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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에서 하룻밤을 쉬고 남해 터미널을 거쳐 "금평" 정류장에 버스를 내렸다. 다시 시작하는 남해 걷기는 신전 마을 해변을 돌면서 내륙으로 들어가 호구산 군립 공원을 향해 산을 오르다가 호구산 아랫 자락의 임도를 걸어 미국 마을에 이른다.
"금평" 버스 정류장에 내려 남파랑길 42코스의 시작점인 남해 바래길 탐방 안내 센터로 가는 길은 해무가 가득하다. 봄 농사를 준비하는 분주함이 느껴지는 3월 중순의 남해는 이른 아침의 서늘함과 봄기운이 공존하는 분위기다.
앵강만, 앵강다숲 마을의 이름에 들어가는 꾀꼬리 앵(鶯)가 워낙 인상적이어서 인터넷에 실제 꾀꼬리의 모습을 찾아보니 참새목 꾀꼬리과로 4월 무렵에 우리나라를 찾는 여름 철새라고 한다. 이름과 소리만큼이나 노란색의 특이한 몸체를 가졌다. 꾀꼬리 소리를 들어보면 마치 홀려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공누리 사이트의 링크를 걸어둔다. 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recommendIdx=10470&division=sound
아름다운 자태의 노란 꽃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히어리"라는 이름을 가진 조록나무과의 낙엽 관목이다. 순천 송광사에서 자생종이 발견될 당시만 해도 멸종 위기종이었으나 꾸준한 복원과 보전 노력으로 2012년 멸종위기종에서 해제되었다고 한다.
남파랑길 여행 지원 센터와 남해 바래길 탐방 안내 센터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이곳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걷기족의 천국인가 하는 찰나의 생각이 무색하게도 안내 센터 앞에는 고양이들이 제집인양 어슬렁 거린다.
남파랑길은 안내센터 측면을 지나 앵강다숲 관리 사무실을 가로질러 간다.
울타리에 걸린 수많은 산악회의 리본을 보면서 단체로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만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모양이다. ㅎㅎ 길 전체에 산악회 리본을 걸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다. 앵강 다숲 해안으로 나오니 해무로 먼 거리의 풍경은 도통 보이지 않는다.
해무와 함께하는 신비로우면서도 평화로운 걷기를 시작한다. 바다 안개를 지칭하는 해무는 차가운 해수면 위로 따뜻한 공기가 지나갈 때 발생한다고 한다. 육지에 사는 사람이 해무를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의외로 해무라는 단어가 개인적으로 익숙한데, 그 이유는 심성보 감독의 2014년작인 해무라는 영화도 있었고, 동력분산식 고속열차의 이름도 해무였던 까닭인 모양이다. 강릉을 오가는 KTX 이음이 해무의 양산형 모델이다.
해무로 화계 마을 포구 앞에 있는 목단도가 겨우 보일 정도다. 이 풍경을 보니 아이들 어렸을 때 전북 부안에 있는 위도로 가족 여행을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국가가 방사능 폐기물 처리장을 설치하려다가 주민들 반대로 무산된 섬이다. 재미있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해무가 하루 종일 걷히지 않아서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회사에 전화로 휴가를 내고 의도하지 않은 강제 휴가를 보내야 했었던 곳이다. 해무를 만나니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길은 화계 마을 포구를 지나 우회전하여 마을길을 가로지르며 북쪽으로 호구산을 향해서 길을 이어간다. 어느 집 정원에서 키우는 동백나무가 절정의 개화기를 보내고 있다.
새초롬하게 꽃을 피운 동백꽃이 떨어져 벽돌담장 위에 얌전하게 앉았다.
화계 마을의 보호수도 지나고 남해의 상징과도 같은 남해 마늘밭도 지난다. 끝없이 이어지는 싱싱한 마늘밭, 튼실한 마늘대가 부럽다. 마을의 수호신 같은 보호수가 있는 마을은 정말 부럽다. 나무에게 공간을 내어주는 품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내 것 하나 더 가지겠다고 나무를 댕강 잘라 버리거나, 제초제로 나무를 고사시키는 모습을 주변에서 쉽게 목격하다 보니 이런 보호수를 가진 마을이 더 부러운 이유일 것이다. 화계 마을의 보호수는 6백 년의 수령을 바라보는 느티나무이다.
1024번 지방도 남서대로 도로변을 잠시 걷다가 개천 이후로 우회전하여 호구산을 향해 간다.
해무가 산까지 밀려와서 산봉우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와중에도 분주하게 봄을 맞이하고 있는 존재들이 우리의 마음을 깨운다. 매실나무가 하얀 드레스를 입었다.
하얀 매화가 눈도 즐겁게 하지만 달콤한 향기로 코와 머리를 깨운다.
작은 돌들로 쌓아 올린 이곳의 다랭이 밭들은 밭을 갈아 놓고 이미 봄농사가 한창이다.
겨울에는 남해 시금치로 농가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못생겨도 맛은 좋을 텐데 이 밭도 얼마가지 않아 트랙터의 로터리에 뒤엎어질 것이다. 아이고 아까워라!
얼마나 올라왔을까? 봉전 소류지를 지나니 멀리 산봉우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역시 고도가 높아지니 이곳에서는 해무도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다.
오르막 농로를 헉헉 거리며 올라가는 길에서는 다양한 모습의 다랭이 밭들을 만난다. 농가 인근으로 사람 손이 많이 간 밭도 있고, 밭 중간에 큼지막한 바위를 미처 빼내지 못하고 그대로 담을 쌓은 밭도 있고, 멀리 농기계가 들어가지 못해 방치된 것으로 보이는 다랭밭들도 보인다. 그 누구는 생존을 걸고 비탈을 깎고 돌을 쌓아 다랭이 논과 밭을 일구었을 텐데 방치된 밭을 보니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땅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치의 변화를 생각하게 된다.
얼마간 오르막길을 걸으면 호구산을 오르는 등산로와 공동묘지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이제 임도를 따라 평탄한 길을 걷는다.
임도 걷기를 시작하는데 젊은 농부 한 사람이 포클레인 한대를 가지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내손으로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곳 임도에서 처음 만난 것은 삼나무였다. 쭉쭉 뻗은 나무들의 조림지를 보면 편백나무 아니면 삼나무가 보통인데 잎을 보니 삼나무가 맞다. 우리나라의 조림 역사가 길어지면서 국산 삼나무 목재도 시장에 나오고 있는데, 삼나무는 건조도 빠르고 습기에 강하고 가공이 쉽고 저렴해서 목재로 뭔가를 직접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한다.
삼나무는 멀리서 보면 수형도 독특해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겼다.
용소 임도를 걷는데 동네 어르신 한분이 오전 산책을 하면서 가벼운 인사를 건네신다. 호구산 주위로 이어지는 임도를 산책하시는 모습을 보며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한적한 임도를 집 근처에 두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바람을 가져본다.
임도를 벗어나면 용소리 마을을 지나 남해 용문사로 이어지는 길을 만나 좌회전하여 길을 내려간다.
길은 용문사길을 벗어나 갓목산 아랫 자락을 돌아서 길을 이어간다. 산 아래로 용소 마을을 보면서 걷는 길에서는 높다란 수로가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지금은 모터 펌프로 어렵지 않게 물을 퍼올릴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이런 수로의 가치는 농민들, 특히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높은 수로를 보니 이 산중에서 어떻게 저런 시설을 만들었을까? 신기하다. 평야 지대에 있는 수로만 보다가 이런 광경을 보니 완전히 딴 세상이다.
갓목산 아랫 자락을 돌아 언덕에 서니 계곡으로 동네 집들과는 다른 특이한 모습의 주택들이 쭉 이어진다. 미국 마을이다. 미국 교포들의 노후를 위해서 남해군이 조성한 특화 마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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