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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전방조제를 지난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며 오류리를 지나 벽파리로 들어서고 작은 망금산 자락에 자리한 이충무공 벽파진전첩비에 닿는다. 벽파정을 지난 길은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며 연동마을(11.8Km)을 지나고 이후로는 임도로 진입하여 서낭산 자락의 고개를 넘어 용장성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둔전방조제를 지나면 명량대첩로 해안도로를 따라 오류리 곶 끝자락을 돌아간다. 언덕 위에서 바다 건너 북쪽을 바라보니 이제 진도 타워도 아득해졌다.

 

겨울 끝자락에서 전 국민의 입맛을 돌게 하는 봄동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당도가 높아지는 봄동의 고소한 맛을 상상하니 입안에 군침이 돈다. 이곳에서는 떡배추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진도는 전국 최대의 봄동 주산지이다.

 

언덕을 지나는 곳에 설치된 생태 터널을 지나니 흐린 하늘 아래로 억새가 멋진 풍경을 만들고 있다.

 

이른 아침부터 구름 가득한 하늘이었는데 날씨가 조금씩 개이면서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추기 시작한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햇살을 정면으로 받는 가슴은 따스해진다. 아침 햇살을 받아 빛나는 해안 도로 옆에 억새밭과 은빛 바다도 아름답다.

 

구름이 걷힌 하늘은 바다 건너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와 그 앞의 송도와 같은 작은 섬들도 시야에 담을 수 있게 해 준다. 

 

해안도로는 고군면 오류리에서 벽파리로 넘어간다. 오류리는 마을에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벽파리의 이름도 독특한데 해변에 핀 벽도나무의 꽃을 미화한 이름이란다. 벽도나무가 뭐지? 하는 호기심으로 찾아보니 복사나무, 즉 복숭아나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꽃 색깔에 따라 백도, 홍도, 벽도라고 부르는데 벽도는 푸른빛이 도는 복숭아꽃을 지칭한다. 벽파리라는 이름을 처음 대했을 때는 큰 바위 절벽과 파도를 상상했는데 전설의 복숭아나무였던 것이다. 

 

"호국의 길 벽파마을"이라는 표지석을 보니 마을 입구에서부터 진중함이 느껴진다.

 

벽파길 도로를 걷다가 벽파마을 버스정류장에서 우회전하여 충무공전첩비 입구로 들어간다.

 

이충무공 벽파진 전첩비는 1956년에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전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의 참전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 장군의 나이가 53세이셨다는 점이 새롭게 나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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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바위산인 망금산 꼭대기에 세워진 벽파진 전첩비를 떠나 아래에 있는 벽파정을 향해 바위산을 천천히 내려간다. 벽파리 일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 일품이다.

 

벽파정 아래로 내려와 화장실도 다녀오고 이른 점심을 먹으며 잠시 쉬어간다.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 표지판이 있고 서해랑길과 만나기도 하지만 동일한 길은 아니다. 서해랑길 6코스는 방조제 둑방길을 걷는다.

 

길은 포구 직전에 있는 양식장 쪽으로 우회전하여 연동마을로 향한다.

 

연동마을로 가는 길에서 만난 마을 초입의 전원주택이 선황산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부러움 마음 한가득 품게 하는 그림이다.

 

남쪽으로는 선황산이 있고 북쪽으로는 해안선에 있는 작은 산이 포근하게 품고 있는 연동마을 안으로 들어간다. 연동저수지에 연꽃이 많아서 붙은 마을이름이라고 한다.

 

남도에 태극기를 달기 위해 깃대봉을 일괄적으로 설치한 마을은 곳곳에 있지만 깃대봉과 종이 함께 있는 마을은 처음 본다. 초인종을 대신하는 것인지, 아니면 비상 상황을 한꺼번에 알리기 위함인지는 모르겠으나 깃대봉과 종은 독특하기도 하고 나름 좋은 아이디어 아닌가 싶다. 농촌에서 대문을 지키는 개가 짖지 않으면 다른 집에 들어가기가 조금은 뻘쭘하기도 한데 종이 있으면 사람이 왔다는 표시를 할 수 있으니 좋지 않을까 싶다.

 

12월 초의 진도 연동마을 들판은 배추와 대파로 푸르름이 가득하다.

 

연동마을을 빠져나온 길은 임도로 진입하며 본격적으로 서낭산 고개 넘기를 시작한다.

 

서낭산 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3.5Km의 구간으로 2백 미터까지 고도를 완만히 올리며 올라가고 고개를 넘으면 완만히 내려가는 구간이다. 전체 구간이 임도이므로 무리 없는 길이다.

 

임도를 걸으며 고도를 조금씩 올린다. 길은 완만해도 오르막길은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한다. 그래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던 얼마 전 여름의 걷기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등에 땀이 조금 베일뿐 선선한 바람이 몸의 열기를 가져간다.

 

바닥에 붙은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 표식을 다시 만났다. 벽파정 이후로 서해랑길은 방조제길로 연동마을을 거쳐 이곳으로 왔지만 삼별초 호국역사 탐방길은 목섬을 거쳐 연동마을을 거쳐 이곳으로 왔고 용장성까지는 서해랑길과 함께 간다.

 

임도 옆 숲 속에는 엄청난 표고목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일부 나무에는 가을에 따고 남은 표고버섯이 달려 있다. 사실 수입 표고버섯의 점유율은 10% 내외라고 하지만, 버섯을 키우는 종균이나 톱밥배지를 중국에서 수입하는 물량을 생각하면 점유율은 70%를 훌쩍 넘는다. 톱밥배지를 수입해서 국내에서 버섯을 키우면 국내산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덧 고갯마루에 이른 모양이다. 지금까지 올라온 고개 아래를 돌아보니 깊은 계곡만 보일뿐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고갯길을 넘어서는 길, 용장성도 군지기미도 모두 삼별초와 연관된 지명이다.

 

쉼터를 지나 하산길을 이어간다. 능선을 지나면 진도군 고군면에서 군내면으로 넘어간다.

 

산 아래 용장제 저수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많이 내려왔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를 지나면 산길이 끝나고 농지가 시작된다.

 

용장제 저수지까지 내려오면 용장사 주차장 아래를 돌아서 서해랑길 6코스 종점이자 7코스 시작점인 용장성 주차장으로 올라간다.

 

배중손 장군의 동상과 고려 항몽 충혼탑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삼별초를 이끌었던 배중손은 고려 조정(원종)이 몽골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1천 여척의 배에 병력과 재물을 싣고 영흥도를 거쳐 이곳 진도에 자리를 잡았다. 10개월에 걸쳐 13Km에 이르는 석성을 쌓고 궁궐도 지어 왕온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여몽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남은 삼별초가 제주도로 넘어가 저항을 계속했다고 한다. 그때 쌓은 용장성의 흔적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다. 당시 배중손을 비롯한 고려 최정예 부대였던 삼별초 장수들은 아마도 외세에 끝까지 저항해야 하는가? 어떻게든 생존해야 할까? 30년에 걸친 몽골의 침략에 의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그냥 두어야 할까? 하는 다양한 고민 끝에 투쟁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용장성의 중심축 역할을 했던 용장사 아래에는 용장성 홍보관이 자리하고 있다. 용장성 주차장 앞에서 여정을 마무리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바로 이어서 7코스 걷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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