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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45코스는 서상항에서 출발하여 남해군 서면 읍내를 거쳐 해안으로 나가서 작장리 해안길을 걷는다. 해안길을 걷다가 인근 펜션에서 하룻밤 쉬어간다.
남파랑길 44코스를 끝낸 우리는 서상항에서 바로 이어서 45코스를 걷는다. 남해 바래길 13코스, 바다 노을길과 함께하는 길이다. 서상항 반대편 방향으로 서상천을 따라 서면 보건소 앞을 지나 읍내로 들어가는 것으로 여정을 시작한다.
면 소재지라 그런가, 서상리 마을은 깔끔했다. 비 맞은 상태라 추위를 느끼고 있는 옆지기는 따뜻한 칼국수를 먹고 싶어 했지만 읍내 식당들은 일요일이라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조금만 더 걸으면 예약해 둔 펜션이 있으므로 마트에서 필요한 것을 구입해서 부지런히 이동하기로 했다. 칼국수는 먹지 못했지만 엉덩이를 따스하게 할 수 있는 서상마을 앞 버스 정류장에서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어 간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다.
버스 정류장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으니 다양한 그림을 만난다. 동네 할머니들이 같이 경로당 가자고 친구를 부르는데, 마치 자신의 집인양 문을 거침없이 여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주인도 당연한 듯 문을 잠그지 않고 다닌다. 터미널에서 서상마을까지 동네 아주머니를 내려준 버스는 잠시 멈춘 듯 보였는데, 기사 아저씨가 이곳에 살고 있는지 한 여성분께서 따뜻한 커피를 들고 와서 기사분에게 건네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긴 시간 운전하는 남편을 위해 버스가 지나가는 시간에 맞추어 따뜻한 커피를 들고 나오신 것이다. 훈훈한 풍경이었다. 우리가 엉덩이가 따뜻한 버스 정류장에서 오붓하게 휴식을 즐기고 있는데, 두 남성분이 정류장 안으로 들어오며 이런저런 말을 건넨다. 우리가 장항마을 해변을 지날 때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이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동네 사람보다는 이곳을 다니러 온 나그네들이 서로 인상에 남았었을 것이다.
길은 읍내를 지나 서상마을 입구에 있는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길 직전에서는 "스테이위드북"이라는 동네 책방을 만났다.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동네 책방, 간판에 적힌 "책과 김밥, 책과 커피, 책과 맥주, 독서 모임"이라는 해시 태그가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위키 백과에서 독립서점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대규모 자본이나 큰 유통망에 의지하지 않고 서점 주인의 취향대로 꾸며진 작은 서점"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나도 내 가게가 있다면 저런 서점을 하나 운영해도 좋겠다 하는 막연한 생각도 든다. 많은 돈을 벌기보다는 많은 나눔을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언덕길을 오르는데 후드득 비가 내리는 상황에서도 언덕 아래 길 건너편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고함 소리가 우렁차게 들린다. 건강한 모습이 부럽다. 비와 땀이 섞이며 운동장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었던 그 시절이 아련하다. ㅠㅠ.
여수 엑스포 당시 서상항과 여수를 20분에 오가는 카페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운항하지 않는다. 터미널은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다. 2023년에는 서상항 인근에서 여수까지 해저 터널이 착공될 예정이니 여수와 서상항을 이어주는 배가 다시 운항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비가 강한 바람과 함께 우리를 휘몰아친다. 우산을 잘못 들면 바로 뒤집어진다. 가물랑산 아랫 자락의 언덕을 넘어간다.
언덕을 넘으면 남서대로 도로를 다시 만나는데 백여 미터 도로변을 걷다가 해안으로 내려간다.
길은 예계마을 표지석을 끼고 좌회전하여 해안으로 내려간다. 예계마을 표지석 옆에 "여기방"이란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양지바르고 따뜻한 곳이라고 붙은 예계마을의 별칭이라고 한다. 바람 불고 비 내리는 흐린 날씨이지만 해무가 없어 바다 풍경을 볼 수 있으니 좋다.
봄이면 벚꽃이 만발할 벚나무길을 내려가 해안으로 내려간다. 바람이 세차게 부니 동해바다만큼은 아니지만 그 잔잔하던 남해바다도 물결이 출렁인다.
만조 때 물결이 치면 이곳도 장난이 아니겠구나 하는 상상을 하며 예계마을 해변을 걸어간다.
지도에서 보면 여수와 남해 사이의 바다는 그리 넓은 곳이 아니다. 그러나, 미약한 인간에게는 이곳조차도 거대한 대양처럼 느껴진다.
예계마을 해변을 뒤로하고 펜션들이 자리하고 있는 해안길을 걸어간다. 세찬 비바람에 가끔씩 펜션벽에서 바람을 피해도 포근하니 좋다.
그런데, 해변과 펜션 사이로 이어지던 포장길은 갑자기 끊어지고 길은 무작정 해안으로 나간다.
지금까지의 포장길은 잊고 이제 날것 그대로의 해안길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비바람은 몰아치고, 작은 우산을 들고 있는 것인지, 걸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이고 거친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어야 하니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는 이 근처의 펜션으로 가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펜션들은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고 해변에서는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었다. 지도 앱을 열고 일단 이동해 보는데 길이 어떻게 열릴지 모르겠다.
속도가 더딘 옆지기의 걸음을 기다리며 비바람 가운데서도 해변 풍경을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다. 둘이서 함께 정신없이 걸었다면 그저 비바람을 뚫고 걷느라 이런 풍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었으리라!
아무런 길의 흔적도 없는 날것 그대로의 해안길을 걷다 보니 이곳이 만조일 때의 풍경은 어떨까 상상이 되질 않는다.
만조 때는 위험하니 1백 미터 정도 둑 위로 걸으라는 표지가 있고 해변 위로 둑길이 있기는 했는데 언덕 위쪽의 펜션으로 이어지는 길은 없었다. 미안하지만 다른 펜션 안쪽을 거쳐서 숙소로 가는 길을 찾았다. 그런데, 막상 다음날 아침 갔던 길로 다시 나오는데 펜션 주인이 여기는 길이 아니라고 뭐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오늘의 숙소는 언덕에 자리한 아라힐펜션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도착한 펜션은 큰 규모는 아니었지만 주인장도 친절했고, 지금까지 우리가 만났던 펜션들 중에 최고였다. 깨끗하고 이런저런 소품도 좋았다. 커피와 쿠키, 라면도 제공받았다. 다시 가고 싶은 펜션이다.
주인장은 다음날 아침 나름의 일정이 있어 배웅을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문자도 남겨 주었다. 세심한 관리를 보면서 펜션을 하려면 저분처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젯밤 세차게 내리던 비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해무도 없는 쾌청한 하늘을 맞이한다.
쾌청한 하늘, 푸른 바다와 함께 상쾌한 여정을 다시 시작한다. 바다 건너 여수 풍경을 보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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