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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산 임도를 지나온 남파랑길 44코스는 산을 내려오면 장항 마을에 닿는다. 장항 마을 해변과 남해 스포츠 파크를 지나서 서상항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쏟아붓는 비를 맞으며 임도를 걸어가는데, 바닥은 질퍽거리기 시작하고 주변은 물안개로 촉촉하다. 물안개가 자욱한 편백숲의 모습 또한 특별하다. 걷는 환경이 녹록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 경험을 어디에서 또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제 비는 임도를 타고 흘러내리면서 흙탕물을 만들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물에 빠지지 않고 발을 디딜만한 곳도 찾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버렸다. 온몸은 축축하지만 다행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으니 여정이 끝나 간다는 것이 마음을 가볍게 한다.
덕월, 서상 간 임도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흙탕물은 과장을 조금, 아니 많이 보태면 황하가 흐르는 모양새다.ㅎㅎ.
편백숲을 돌아 내려가는 길, 신발의 축축함과 몸의 피로, 땀과 비가 섞인 불쾌함 보다는 어디에서도 해 볼 수 특별함 경험에 발걸음은 가볍다.
산 아래로 내려오니 비는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런 날씨를 보니 임도 중간에 있던 전망대에서 쉬고 내려올걸 하는 생각도 들기는 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서는 주인공인 소년과 소녀가 피를 피해 원두막으로 들어갔지만 감성도 중년인 우리가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걸은 것도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장항 마을로 내려가는데 한쪽밭에서는 무시무시한 허수아비들이 밭을 지키고 있었다. 빨간 옷에 얼굴은 험악하게 만들어 놓았다. 어떤 작물을 지키려는지 모르겠지만 참새들이 무서워할지는 모르겠다.
하얀 매화가 활짝 핀 매실 과수원을 지나 장항 마을로 내려간다. 과수원도 돌담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다랭이 밭이다.
종이꽃이라면 비 맞으면 사그라졌을 텐데, 연약해 보이는 매화꽃들은 그렇게 세찬 비를 맞고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물 머금은 장항 마을의 촉촉한 산야가 한 폭의 그림이다. 참 좋다.
비를 머금은 산수유가 영롱하다. 비 맞은 남파랑길에서 누리는 환상의 절경이다.
언덕 아래로 장항 마을과 함께 멀리 해안의 작은 연봉산, 남해 스포츠 파크의 호텔도 시야에 들어온다.
장항 마을로 내려가는 길, 그렇게 비를 퍼부었던 비구름도 산 위로 올라가고 있다.
남서대로 도로로 나온 남파랑길은 잠시 도로변을 걷고, 작은 하천을 건너면 하천을 따라서 해변으로 길을 잡는다.
하천변에 다랭이 밭을 만들기 위해 쌓아 올린 돌담을 보니 그저 와우! 하는 조용한 감탄사를 내뱉을 수밖에 없다. 하루 이틀에 이룰 수 없는 일, 피땀이 동반되어야 하는 일 그 일로 만들어진 다랭이 밭에는 남해 마늘이 푸릇푸릇하다.
해변으로 나오니 어제부터 해무로 우리에게 보이지 않았던 바다 건너 여수도 시야에 들어오고 여수와 남해 사이의 바다를 오가는 커다란 배도 볼 수 있다. 2023년에는 여수와 남해 사이에 해저터널 공사도 시작한다고 한다.
해변과 숲 사이에 방호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장항 해변은 훌륭산 장항숲도 좋고 몽돌 해변도 훌륭하다. 2021년 사진들을 보면 높은 방호벽이 없었는데 파도로 인한 피해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해수 풀장도 있었는데 지금은 운영하지 않고 대신에 수제 버거집이 들어섰다.
비가 내린 덕택에 해무는 물러가고 맑은 해안 풍경을 만난다. 장항마을의 몽돌 해변도 참 좋다. 앞으로 보이는 연봉산 방향으로 길을 이동한다.
길은 여러 개의 야구장과 축구장을 품고 있는 남해 스포츠 파크를 가로질러 서상항을 향한다. 거북선 모양의 놀이터도 특이한 조형물도 눈에 들어왔지만, 제일 눈에 확 들어왔던 것은 커다랗게 붙여놓은 화장실 표식이었다. 볼일 급한 옆지기가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워낙 넓은 곳이니 화장실 표식도 큼지막하게 붙여 놓은 모양이다.
인조잔디 구장도 있지만 국제 규격의 천연 잔디 구장이 5개나 있는 규모가 엄청난 곳이다. 44코스 시작점 평산항 인근에 있던 상당한 규모의 골프장이 간척지에 세워진 것처럼 44코스 종점 서상항이 있는 남해 스포츠 파크가 있는 이곳도 간척지였다. 평산마을의 골프장처럼 부산에서 흙을 퍼다가 만든 것도 아니고, 인근의 산을 깎아서 만든 매립지가 아니다. 여수와 남해 사이의 바다를 지나 광양으로 가는 큰 배들이 원활하게 지날 수 있는 것은 바다를 준설했기 때문인데 그 준설토로 이곳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특이한 조형물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구본주 작가의 "성공 시대"라는 작품이다. 작품 이름처럼 가정과 사회에서 슈퍼맨과 같은 모습을 보이며 사는 한국 사회의 남성상을 그린 것이라 한다.
모양은 남해대교처럼 생겼는데 서상천을 건널 수 있는 이 다리의 이름은 보물섬 흔들 다리이다. 흔들 다리를 건너면 서상숲이다.
길은 보물섬 흔들 다리 앞을 지나 서상천을 따라 해변 방향으로 향한다.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서상천 끝에서 인도교를 건너면서 남파랑길 44코스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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