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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면 사무소에서 출발하여 남일대 해수욕장과 진널 해안 산책길을 지나 삼천포 신항을 가로지른 남파랑길 34코스는 노산 공원을 한 바퀴 돌아 삼천포 용궁 수산 시장을 관통하여 해안변을 걷고 삼천포대교 사거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노산 공원의 해안 데크길을 걸어가는 길, 일몰의 태양이 커다랗게 다가온다. 가까이 가면 모든 것을 태워 버리겠지만 적당한 거리에서는 생명과 에너지의 원천이 되는 태양이 주는 교훈이 크다.

 

물고기 조형물을 지나 데크길은 육지 방향으로 방향을 돌려 돌아간다. 이제 서쪽으로 삼천포 대교를 보며 걷는 길이다.

 

주위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는 석양을 뒤로하고 노산 공원 입구 방향으로 이동하다 보면 박재삼 문학관이 있는데 해안부터 그분의 시비가 등장했다. 일제 강점기 1933년 동경에서 태어난 네 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옮겨와 삼천포 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나왔고 1955년 유치환과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1997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15권의 시집을 펴냈다. 어렵지 않은 언어로 우리 민족의 한을 시로 표현한 서정 시인이다. 누군가는 그를 "슬픔의 연금술사"라 표현하기도 했다.

 

겨울 나그네

마흔다섯으로 접어드니
세월은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하면서
내 이마에 잔주름을 잡고
허리 밑에 찬바람을 일으키고
머리 위에는 눈발을 날려
영락없는 겨울 나그네의 이 쓸쓸함이여

솔잎에 송충이던가,
오장육부(五臟六腑)도 갉다가
살갗도 갉다가
아침 밥숟갈 드는 손의 힘도 앗아가고
무엇도 앗아가고 무엇도 앗아가더니

마지막 눈 정신(精新) 쪽에는 그래도
남겨줄 것을 남겨주었더라는 듯,
막내아이 치는 팽이가
한창 신을 내고 돌아가는 판에
햇빛이 장난치듯 감겨들고 있는 것을,
오, 아이의 손에 세월이 잠깐 묶이고 있는 것을,
눈물겨운 광경으로 환히 환히 내려다보노라

그의 시 중에서 겨울 나그네라는 작품을 읽어보니 가난과 술로 얻은 병마 속에서 보냈을 시인의 노년을 상상하게 된다. 오버랩되는 나의 노년에는 시 한 편 쓸 수 있는 정신적인 기력이라도 남아 있을지......, 툭툭 내뱉는 듯한 시인의 언어 속에서 찬란한 감탄만이 남는다.

 

동백이 만발한 산책로를 지나 공원 입구로 향한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과 박재삼 문학관을 지나면 노산 공원 입구에 닿는다.

 

노산 공원 입구의 계단에서 삼천포 시내의 모습. 시가지 전경을 보는 것보다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계단 난간에 새겨진 주옥같은 박재삼 시인의 시구들이었다.

 

밤바다에서

누님의 치맛살 곁에 앉아
누님의 슬픔을 나누지 못하는 심심한 때는
골목을 빠져나와 바닷가에 서자.

비로소 가슴 울렁이고
눈에 눈물 어리어
차라리 저 달빛 받아 반짝이는 밤바다의 진정할 수 없는
괴로운 꽃비늘을 닮아야 하리.
천하에 많은 할 말이, 천상의 많은 별들의 반짝임처럼
바다의 밤물결되어 찬란해야 하리.
아니 아파야 아파야 하리.

이윽고 누님이 섬에 떠 있듯이
그렇게 잠들리.
그때 나는 섬가에 부딪치는 물결처럼 누님의 치맛살에 얼굴을 묻고
가늘고 먼 울음을 울음을,
울음 울리라.

"바다가 낳은 박재삼 시인"이라는 표현의 다면을 볼 수 있는 "밤바다에서"라는 시다.

 

매미 울음에 

우리 마음을 비추는
한낮은 뒷숲에서 매미가 우네

그 소리도 가지가지의 매미울음.
머언 어린 날은 구름을 보아 마음대로 꽃이 되기도 하고 잎이
되기도 하고 친한 이웃아이 얼굴이 되기도 하던 것을.

오늘은 귀를 뜨고 마음을 뜨고, 아.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또는 대님 푸는 소리로까지 어여삐 기뻐 그려낼 수 있는
명명(明明)한 명명(明明)한 매미가 우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마음도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 질 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오래간만에 시 감각을 깨워준 시인을 만났다.

 

노산 공원을 내려와 좌회전하면 이름하여 삼천포 용궁 수산 시장이 이어진다.

 

시장이름에 용궁을 넣다니! 한편으로는 우스운 생각도 있었지만 과감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벽면을 용궁 그림으로 채운 공간 한쪽에는 매주 주말마다 상인회가 주최하는 용궁 음악회가 열린다는 펼침막도 있었다.

 

수산 시장을 지나는데, 걷기 여행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지갑을 열 것 같은 마음이 충동질했다. 기어코는 건 대구를 팔고 계시는 분께 가격을 물어보는데 말린 대구를 물에 불려 대구탕으로 끓이기도 하지만, 얇게 저며 내면 술안주로 그만이라는 설명도 해주신다. 문제는 건대구를 구입하고 싶은 우리도, 선물을 받을 어르신들도 대구라는 생선과 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먹어 본 적도 없고 자주 접하지도 않았으니 참으로 난감한 노릇이었다. 여행 끝 무렵이니 들고 갈 수도 있었지만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ㅠㅠ

 

건어물 가게가 즐비한 시장을 빠져나가 해안길을 이어간다.

삼천포항 방파제로 연결되는 다리 너머로 황금빛 석양이 절정을 향해가고 있다.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는 삼천포항을 뒤로하고 해안길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황금빛 석양에 감탄이 절로 쏟아진다.

 

황금빛으로 물든 하늘을 배경 삼은 삼천포 대교를 보며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제 34코스 종점 인근인 대방길에 진입했다.

 

길지 않은 석양의 황금빛 쇼도 얼마 남지 않았다.

 

사천시의 삼천포 코끼리길도 남파랑길 34코스도 얼마 남지 않았다. 코끼리길 안내 표지는 다시 보아도 엄청 화려하다.

 

길은 삼천포 유람선 선착장 앞을 지난다. 배들이 화려하다. 최근에는 11:30, 14:00에 출항하여 창선대교, 삼천포대교를 지나 삼천포 화력발전소와 남일대 코끼리를 바위를 지나 다시 되돌아오는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니 아쉬움은 없다.

 

해안길을 이어가는 여정, 석양은 서쪽 섬들 아래로 점점 더 내려간다.

 

석양빛이 기막힌 조명을 비추고 있는 삼천포 대교를 보며 걷다 보니 어느덧 길은 대방진 굴항에 도착했다.

 

삼천포 대교 직전에 있는 대방진 굴항은 대방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왜구를 막기 위해 수군이 전함과 함께 상주하던 곳이라고 한다. 전함을 정박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둑을 쌓아 만든 항구이다. 남파랑길은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대방사거리를 지나 큰길에서 여정을 마무리 한다.

 

삼천포 터미널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이므로 우리는 택시로 이동하기로 했다. 기사분은 우리의 옷차림을 보더니 단박에 남파랑길을 걷고 있는 거냐고 묻는다. 추운 날씨에 고생이 많다고, 다음 코스인 각산도 좋다고 다음번에는 따뜻할 때 내려오라고 한다. 어떤 분들은 남파랑길을 택시로 가자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하시고, 자신도 친구들과 걷기 여행을 한다는 이야기, 사천시와 삼천포시가 통합하는 과정의 이야기 등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쾌한 시간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하여 대전 가는 버스를 예약한 사천 터미널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표를 끊으니 티켓에 "선착순 승차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그야말로 좌석이 정해지지 않은 티켓이었다. 외국인이 언어를 모르면 도저히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런 환경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그만 진주로 가는 완행 버스를 타고 말았다. 사천으로 한번 정도 정차하고 바로 가는 직행 버스도 있는데 그런 것을 몰랐던 것이었다. 완행 버스는 시내버스처럼 모든 정류장에 정차하며 승객을 태웠고 좌석이 없으면 서서 갈 수도 있는 시스템이었다. 하굣길의 학생들이 많이 타고 내렸다. 시간 여유가 있어 다행이었지만 사천과 삼천포를 오갈 때는 이런 시스템을 알고 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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