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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Km가 넘는 거리를 주파해야 하는 TMB 걷기 2일 차의 마지막 고비입니다. 고도 1,210m의 노트르담 예배당에서 시작한 오르막을 이어가서 2,329m의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에 도착하면 큰 고비는 넘긴 것입니다. 조베 평원에서의 쉼을 뒤로하고 다시 오르막을 오릅니다.

 

신발을 벗고 조베 호수에서 얼음 계곡물에 살짝살짝 발을 담그다 보니 산 그림자가 햇빛을 가려 금방 쌀쌀한 기운이 밀려옵니다. 오후 2시 10분이 지나는 시각, 10여분의 휴식을 접고 우측의 TMB 경로 표지판을 따라 본옴므 고개를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이곳은 조베 호수로 가는 갈림길인데 좌측의 조베 호수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냥 따라 가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조베 평원 위로는 양 떼들을 방목하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소만 보고 워낭 소리만 듣다가 양무리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커다란 소들은 전기가 흐르는 가느다란 전선 하나로 목책을 세우는 반면 양 울타리는 망 모양의 것을 둘러친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습니다.

 

점점이 멀리 보이는 사람들의 윤곽을 통해서 우리가 갈 길을 가늠해 봅니다. 까마득, 아찔과 같은 단어들이 무거운 배낭과 함께 어깨를 짓누르지만 7월에 마주하는 눈 풍경에 모든 것을 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눈길을 지나 길을 오릅니다. 눈길만큼 흔적이 명확한 것은 없죠.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을 쫓아 겸손하게 걷게 하는 길입니다. 아이젠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앞으로도 이 정도의 눈길이라면 괜찮겠지! 하는 위안을 가집니다. 이때만 해도 내일 눈길에서 벌어질 일은 상상도 못 했죠.

 

봉넝강의 위세는 상류에서도 대단합니다. 며칠 사이에 비가 많이 내린 것도 아닌데 본옴므 고개에서 시작한 눈 녹은 물의 위세가 노트르담 예배당을 지나 레 꽁따민느 시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강한 햇빛을 받으면 두꺼운 외투를 벗듯이 여름 태양을 받은 알프스가 겨우내 입었던 하얀 외투를 아직도 벗고 있는 모양입니다.

 

조베 평원에서 10여분 올라왔을까요?  이번에는 야트막한 언덕 풍경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뒤돌아 내려다보면 줄지어 길을 오르는 많은 사람들을 보며 "뒤처지지 않았군, 잘하고 있어, 힘내!" 하면서 스스로를 격려해 줍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외투를 하나씩 걸치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양달에 있으면 괜찮은데 구름이 해를 가리거나 산 그림자를 통과할 때는 쌀쌀합니다. 벗어 두었던 장갑도 착용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이 아득하게 보일 때는 많이 걸어온 듯한데 앞에선 봉우리들은 기를 팍팍 죽입니다.

 

 

해발 고도 이천 미터가 넘는 이곳의 풀들은 키가 크지는 않지만 노란 꽃들로 자신들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습니다.

 

다머 평원(Tumulus Plan des Dames, 2,043m)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그냥 돌무더기이지만, 튀뮐뤼스(Tumulus)는 불어로도 영어로도 봉분이란 의미로 예전에는 한 영국인의 무덤이었다고 합니다. 평원의 모습이 마치 누군가 잔디를 깎아 놓은 듯합니다. 아이들 풀어놓고 공놀이 시키면 딱 일 공간입니다.

 

드디어 멀리 본옴므 고개가 시야에 들어오는 듯합니다. 고개 아래쪽으로 줄지어 눈길을 횡단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자연스레 아! 하는 탄식을 내뱉게 합니다.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알프스 야생화 감상으로 휴식을 취합니다.

 

별명이 "Molten Gold, 녹인 금"이라는 산미나리아재비(Mountain buttercup, Ranunculus montanus).  동북아에 서식하는 미나리아재비는 꽃 모양이 동글동글하고 산미나리아재비는 하트 모양 비슷하네요.

 

귀족적 자태를 뽐내는 보랏빛 야생화.

 

서양톱풀(Achillea distans). 순백의 아름다운 신부를 연상시키는 꽃입니다. 

 

용담(Gentianaceae). 저도 조금은 쌀쌀함을 느끼지만 꽃이 추워 보입니다.

 

여러 야생화들이 서로 살려고 경쟁하기보다는 쌀쌀한 고지대의 날씨 속에서 서로의 몸을 얽어가며 체온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잔설이 남아있는 산봉우리들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마치 봉우리를 향해서 전진하는 초록빛 야생화 군대가 아직도 남아있는 하얀 마녀의 잔당들을 소탕하고 있는 결과물처럼 느껴집니다.  

 

힘들게 오르막을 오르고 있는데 뒤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바로 산악자전거였습니다. 이 산길을 자전거로 내달린다니!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산악자전거의 짜릿한 스릴에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습니다.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 없는 길에서는 자전거를 어깨에 메고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가면 만나는 눈길에서도 그렇고요. 아무튼 대단합니다!

 

드디어 눈길에 도착했습니다. 아래에서 이 눈길을 바라보며 아이젠도 없는데 저기를 어떻게 가야 하는 염려가 있었었죠. 히마라야 고봉을 정복하는 것도 아닌 평범한 트레킹인데 사진만 보면 지금이 7월 한 여름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날씨가 영하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쌓인 눈도 푹신한 편이어서 아이젠이 없어도 걸을만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래도 눈길의 대부분이 안전했지만 워낙 많이 사람들이 지나간 터라 미끄러운 것은 조심해야 했습니다. 옆지기의 경우 자꾸 미끄러져서 한걸음 한걸음 옮기느라 거북이걸음을 했습니다.

 

잔설이 남아있는 아찔한 고봉들이 멀지 않아 보이니 그 위압감이 보통이 아닙니다. 고개 근처에 이르니 이제는 아래쪽도 아득해 보입니다.

   

멀리 본옴므 고개가 보입니다. 고개에 가까워질수록 초록빛은 적어지고 회색빛 바위와 자갈, 잔설이 황량함을 더합니다. 더구나 구름이 해를 가리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고 한 여름에 장갑을 착용했음에도 스틱을 잡은 손이 시려서 가끔씩 손을 녹여 주어야 했습니다. 한국에서 짐을 챙기면서 일부러 손가락에 구멍이 있는 장갑을 준비했었는데 이때는 너무 추우니까 그냥 구멍 없는 장갑을 준비할걸! 하고 아쉬워했었습니다.

 

드디어 본옴므 고개(Col du Bonhomme, 2,329m)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고개 같았으면 고갯마루를 정복한 기쁨을 누리며 휴식했겠지만 급격히 떨어진 온도와 강한 바람 때문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아주 작은 대피소가 있어 잠시 바람을 피할 수 있기는 했습니다. TMB 걷기에서 고개는 어렵게 올라온 오르막을 끝낸 기쁨과 휴식, 그리고 완만한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지만 본옴므 고개는 아닙니다. 본옴므 산장까지 급한 경사는 아니지만 조금 더 오르막을 걸어야 합니다. 본옴므 산장 근처까지 50분이라고 표지판에 적혀 있으니 거의 다 온 것이지만 지쳐버린 몸상태와 강한 바람으로는 두 시간 내에 주파해도 잘한 것이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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