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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올레길 여행에서는 글을 하나 꼭 써보자 하는 결심이 있어서 길지 않은 글을 써서 라디오 사연에 응모했는데 다행히 방송되었네요. 내 이야기가 라디오 전파를 탈 때의 느낌은 정말 짜릿합니다. 2019년 4월 23일 CBS 음악 FM 한동준의 FM POPS "내 마음의 보석송"에 방송된 내용입니다. 작가께서 조금 편집을 했는데 무리 없었습니다. 글을 옮겨 봅니다. 신청곡으로 Air Supply의 "The Long And Winding Road"를 부탁드렸지만 원곡인 비틀즈 버전으로 들려주셨네요. 더 좋았습니다.
2019년 4월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
제주 올레길과의 첫 인연은 2015년 겨울이었습니다. 헌책방에서 골랐던 서명숙 작가의 "놀멍 쉬멍 걸으멍, 제주 걷기 여행"이라는 책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작가가 인생의 고비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길을 걷다가 자신의 아름다운 고향인 제주에 모두가 좋아할 만한 길을 만들자며 시작한 것이 제주 올레길임을 알게 되었죠. 책에 푹 빠져서 때로는 미소로 때로는 울음을 참아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책을 만난 바로 다음 해 2016년 4월 저희 부부는 제주 올레길을 처음 걷기 시작했습니다. 저가 항공사 덕택에 부부 둘이서 11만 원이라는 부담 없는 가격에 왕복 항공권을 끊고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값싼 항공권을 구하려면 사람들이 적은 평일 저녁에 출발하고 제주에서는 아침에 출발해야 했습니다. 휴가도 써야 했고 일정에 제약도 있었지만 매년 조금씩 걷고 있는 제주 올레길은 올 때마다 늘 감탄을 자아내게 했고 미소 띤 얼굴로 집에 돌아가게 해 주었습니다.
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기쁨도 있지만 저마다의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한 법이지요. 2019년 4월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도 저희에게는 보물 찾기에서 만난 보물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 역시 서귀포시 남원읍 해변가에서 반건조 오징어를 파시는 아저씨였습니다.
올레길을 걷다 보면 해변가에서 오징어를 널어서 말리고 있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만나는데 평소 같으면 걷기에 열중하며 그냥 지나치지만 이번처럼 군것질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저씨와의 대화는 옆지기가 던진 작은 질문이 시작이었습니다.
"오징어 두 마리 주세요! 그런데, 아저씨 저기 널고 있는 것이 한치예요, 오징어예요?"
당연히 오징어라고 생각하던 제가 무안해질 틈도 없이 아저씨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크기가 한치라고 해서 한치라고 하지, 제주에서는 오징어 껍질을 모두 벗겨서 말려"라고 친절하게 답해 주셨습니다.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던 저희는 한치의 이름이 한치, 두치, 세 치하는 크기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이내 이해하고는 "아하!" 하며 크게 웃었습니다.
그렇게 한바탕 웃음으로 아저씨와의 재미있는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서울에 살았으면 주말마다 산에 가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는데 지금은 넓은 바다를 정원삼아 소일하는 것이 너무나 좋다고 하셨습니다. 한때 몸담았던 직장 이야기와 모시고 사시는 어머님 이야기, 제주에 내려와 사시는 것에 어려움이 없으셨는지, 가끔 낚시는 하시는지, 이것 저것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징어 두 마리가 거의 다 구워질 무렵, 아저씨는 오징어 한 마리를 더 꺼내시더니 굽고 있던 두 마리와 같이 굽기 시작하셨습니다.
"아저씨 저희 두 마리만 시켰는데요!" 했더니 아저씨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시면서 마침 다가온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셨습니다.
계산을 끝내고 저희를 보내면서도 아저씨는 자신이 모아 놓은 저렴한 맛집들의 명함을 사진 찍어 가라며 안내해 주시고, 이어지는 길에서 꼭 봐야 할 곳도 안내하시는 가슴이 푸근한 분이셨습니다. 아저씨께서 보너스로 얹어주신 오징어 한 마리도 좋았지만 그분이 전해 주신 보물 같은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듯합니다.
같은 방향으로 길을 걷다 보면 어떤 사람들과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여러 번 만나기 때문에 나중에는 마치 오랜 이웃을 만나는 것처럼 서로 미소로 인사를 대신하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서도 그런 분이 있었습니다. 저희와는 일면식도 없었던 분이었지만 같은 길을 걷다 보니 두 번째 만날 때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큰 배낭을 메고 혼자서 걷고 있던 남성분이었습니다. 올레길에서 그분을 두번째 만날 때는 뒤따라가던 저희가 멀리서 보기에도 특이한 자세로 쉬고 계셨습니다. 가까이에 가서 보니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양말까지 벗은 채로 발에 뭔가를 바르고 계셨습니다."지금 발에 바르고 계신 것이 뭐예요?"라는 질문 하나에 그분은 짧지만 강렬한 그의 삶의 일부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제가 2주 후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는데, 그것에 대비해서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고 지금 제주도 올레길을 걷고 있습니다."
"제가 바셀린도 써보고 했는데 이 파우더가 좋더라고요. 인터넷에서 파니까 확인해 보세요."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는 흡사 전쟁터를 앞두고 있는 비장한 각오의 군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그를 지리산 둘레길과 제주 올레길을 거쳐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걷게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비장한 그의 표정은 기나긴 길을 걷는 피곤함보다는 앞으로 걸을 길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습니다.
저희도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하며 응원의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는데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우리나라에 제주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귀중한 우리 민족의 자산이 잘 보존되어서 우리 후손들에게 치유와 참 쉼의 공간으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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