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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면 신평마을을 지나는 남파랑길 83코스는 마을길을 벗어나면 백련사길 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올라 백련사에 이른다. 백련사 입구의 동백나무숲을 지나면 다산초당으로 향하는데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다산 초당에 닿는다.
해창 해안을 지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길, 유명한 백련사와 다산 초당으로 이어지는 길이라서 그런지 길을 열심히 정비하고 있었다.
백련사의 동백숲이 유명하다고 하는데, 백련사와는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지만 신평 마을의 가로수 동백나무에 탐스러운 열매가 맺혔다. 쫙 벌어진 것이 밤송이 같기도 하고, 겉껍질 안의 열매가 마치 육쪽마늘처럼 보이기도 한다. 열매 하나하나는 조금 큰 잣 모양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수많은 동백나무를 만났지만 동백나무의 열매를 보는 것은 처음이다.
벌어지지 않은 동백열매를 보면 무슨 사과나 귤 같은 열매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밤송이처럼 벌어진 동백 열매를 보아야 동백꽃부터 씨앗까지 전부를 본 것 아닌가 싶다.
길은 신평마을로 진입한다. 마을 초입의 특이한 풍경, 바나나가 노지에서 자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닐하우스에서 키우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노지에서 크고 있는 바나나는 처음이다. 따뜻한 남쪽나라 강진이니까 약간의 도움을 주면 여러해살이풀인 바나나는 노지 월동도 가능하다고 한다.
만덕산 아랫자락을 따라 이어진 신평마을의 마을길을 걷는다. 만덕산이 찬바람을 막아주는 지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마을로 덕산마을에서 분리된 지 50여 년 된 신생마을이다.
마을 입구 한 가정집 기둥에 능소화가 한가득이다. 담쟁이처럼 기둥을 감고 올라간 능소화가 커다란 꽃 한 다발 같다. 낯선 이의 발걸음에 멍멍이는 소란스레 짖고, 주인 어르신은 조용하라고 타이르는 소리가 능소화와 함께 정겨운 아침 풍경을 만든다.
짙은 녹음에서 조금씩 가을색을 담고 있는 식물들, 높고 푸른 하늘과 더욱 눈부시게 하얀 흰구름에 뜨겁게 달궈지기만 했던 마을길의 아스팔트 마저 가을색이 도는 것 같다.
전봇대에는 남파랑길 표식과 함께 "다산 정약용 남도 유배길 2코스"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정조 사후 처음 유배를 떠난 곳은 포항 장기면으로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도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같은 해 10월 처조카 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고 2차 유배를 떠나는데 그것이 강진행이었다. 나주에서 형 정약전과 헤어지고 영암을 거쳐 강진으로 이동했는데 이 구간을 다산 정약용 남도 유배길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총 4개 구간인데 2코스는 다산 초당과 백련사를 포함하고 있다.
마을길을 걸으며 제초제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논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봄부터 물속에서 여린 잡초와 유기물을 먹고 큰 우렁이들이 여전히 열심히 활동 중이다. 생태교란종으로 지정되었지만 농민들은 매년 봄이면 새끼를 구입해서 논에 뿌리는 이상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우렁이 없이 친환경 농사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제초 효과는 탁월하지만 환경 전문가의 입장은 또 다른 모양이다.
언덕을 오르다 해안 쪽으로 돌아보니 조금씩 이삭이 익고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가을색을 입고 있는 들판이 푸른 하늘과 대비되며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신평마을은 생강과 당근을 많이 심는다고 하던데, 역시 밭두둑에는 푸릇푸릇한 당근 줄기들이 쑥쑥 크고 있었다. 마을길 끝자락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흰구름을 모자처럼 걸친 만덕산 품 안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간다. 마을길 끝에서 백련사길 도로를 만나 도로를 따라 오르막 길을 오른다. 마을길이 도로와 만나는 지점은 사거리인데 길 건너편은 늦봄문익환학교라는 대안학교로 가는 길이다. 고 문익환 목사의 뜻을 기리며 2006년 개교하여 중고등학교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 통일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문익환 목사의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호가 늦봄인 것은 처음 알았다. 늦은 나이에 운동권에 참여했다고 붙인 호라고 한다.
백련사길 도로를 따라 오르막길을 한 걸음씩 옮겨간다. 숨은 헐떡거리지만 나무 그늘이 있어 다행이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면 만덕산의 바위 봉우리들이 존재를 뽐낸다. 추석을 맞아서 벌초하러 오신 주민분이 짐을 정리하면서 어디까지 가냐고 가볍게 질문을 던진다. 땡볕에 배낭을 메고 헉헉대며 오르는 우리에게 눈길이 가는 모양이다. 다산초당까지 간다고 하니,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가는 산책길이 참 좋다고 하신다. 내 고장에 자랑하고 싶은 산책길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을 것이다.
백련사는 동백숲으로 유명하지만 도로 좌측으로는 편백숲도 훌륭했다. 편백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 따스하다. 단편적 경제성보다 생물 다양성의 가치가 존중되는 숲 관리로 후대가 풍성한 자연을 누렸으면 좋겠다.
만덕산 백련사라 적힌 화려한 입구로 들어선다. 길은 사찰 경내로는 들어가지 않고 내부로 들어가다가 사찰 직전에 다산 초당으로 가는 숲길을 걷는다. 9세기 신라 문성왕 때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졌고, 13세기 고려 희종 때 백련결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천연기념물 제151호인 백련사 동백숲을 걸어간다. 붉은 동백꽃이 핀 계절이라면 더욱 환상적이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천여 그루의 자생 동백나무가 이런저런 나무들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숲길을 걷는 것 자체로 좋다. 한편에 고재종 시인의 "백련사 동백숲길에서" 일부를 적어 놓았는데 원문을 인용해 놓는다. 시인도 동백꽃이 한창일 때 이곳을 걸은 모양이다.
누이야, 네 초롱한 말처럼
네 딛는 발자국마다에
시방 동백꽃 송이송이 벙그는가
시린 바람에 네 볼은
이미 붉어 있구나.
누이야, 내 죄 깊은 생각으로
내딛는 발자국마다엔
동백꽃 모감모감 통째로 지는가.
검푸르게 얼어붙은 동백잎은
시방 날 쇠리쇠리 후리는구나.
누이야, 앞바다는 해종일
해조음으로 울어대고
그러나 마음속 서러운 것을
지상의 어떤 꽃부리와도
결코 바꾸지 않겠다는 너인가.
그리하여 동박새는
동박새 소리로 울어대고
그러나 어리석게도 애진 마음을
바람으로든 은물결로든
그예 씻어 보겠다는 나인가.
이윽고 저렇게 저렇게
절에선 저녁종을 울려대면
너와 나는 쇠든 영혼 일깨워선
서로의 무명을 들여다보고
동백꽃은 피고 지는가.
동백꽃은 여전히 피고 지고
누이야, 그러면 너와 나는
수천수만 동백꽃 등을 밝히고
이 저녁, 이 뜨건 상처의 길을
한 번쯤 걸어 보긴 걸어 볼 참인가.
햇빛도 거의 들어오지 못하는 울창한 동백숲의 작은 연못도 지나고, 붉은 동백이 가득한 숲도 상상하며 걷다 보니 어느덧 해탈문에 이른다.
붉은 동백이 있던 자리에는 귤처럼 생긴 열매가 달리고, 그 열매는 밤송이처럼 겉껍질을 열어 잣열매처럼 생긴 씨앗을 세상에 내놓는다.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은 철학의 숲, 사색의 숲이므로 말없이, 조용히 사색하며 걸으라는 안내판이다. 사실 고개를 넘는 오르막 숲길이므로 거친 숨 말고는 말할 여지가 없다. 백련사 경내로는 들어가지 않고 사찰 앞에서 좌회전하여 숲길로 들어간다.
다산초당 가는 길을 따라 숲길로 들어간다. 해월루와 깃대봉으로 연결되는 분기점이 고갯마루이고 이후로는 내리막길이다.
역시 가을이다. 동백나무처럼 은행나무도 잎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지만, 다 익은 은행 열매를 바닥에 수북하게 떨구어 놓았다.
다산초당으로 이어지는 고개로 가는 길, 칡덩굴과 나무들 너머로 보이는 강진만 바다가 아련하다. 하늘은 온통 가을색이다.
조용히 몸을 움직이며 언덕을 오르는 길은 잡생각을 날리며 사색에 잠기기 참 좋은 길이다.
해월루와 깃대봉으로 연결되는 분기점, 고갯마루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잠시 앉아서 쉬어 갔는데, 숲 모기들에게 집중 공격받는 장소였다. 마치 사람이 와서 앉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사정없이 달려든다. ㅠㅠ
끝까지 달라드는 모기의 손길을 뿌리치며 서둘러 배낭을 메고 고개를 내려간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다산초당의 건물이 보이고 이곳을 찾은 여러 관광객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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