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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코스에 이어서 걷는 63코스는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를 따라 벌교 읍내를 한 바퀴 돈다. 부용교 앞에서 출발하면 강변 산책로를 걷다가 도로로 올라가 벌교 홍교를 통해서 벌교천을 건넌다. 벌교천을 건너면 채동선 선생 생가를 지나 부용산 M1 고지를 올라 벌교 시가지를 둘러본다. 산을 내려오면 시가지를 걸으며 소설에 나오는 벌교 금융조합과 보성 여관을 차례로 지난다.
25Km에 육박하는 남파랑길 62코스를 끝내고 63코스의 벌교읍내 구간을 걸을지 여부를 옆지기와 딸내미에게 물으니 그냥 가자고 한다. 힘들어서 멈춰서 허리를 숙이며 쉬었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는 딸내미의 모습이지만 계획대로 가겠다고 한다. 똥고집은 누구를 닮았는지...... 결국 오후 5시가 넘은 시간, 오늘만 8시간째 걷고 있으나 부용교 앞을 떠나 벌교천 강변 산책로를 따라 63코스 걷기를 시작한다.
강변 산책로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소설가 조정래, 민족음악가 채동선, 독립운동가 나철로 이어지는 벌교의 인물들을 만나고 소설 태백산맥의 구절들을 만나는 공간을 통과한다. "못 헐 말로 나라가 공산당 맹글고, 지주덜이 빨갱이 맹근당께요" 하는 구절을 통해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는 소설 태백산맥을 아주 살짝 엿볼 수 있다. 소설가를 꿈꾸는 딸내미에게 좋은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 벌교 살아요"라는 문구를 붙인 미리내교 다리를 보니 이곳 사람들의 자기 고장에 대한 사랑과 애착이 느껴진다. 부럽다. 사람만 건널 수 있는 다리다.
길은 미리내교 앞을 지나서 다시 강변 산책길로 돌아온다.
강건너로 조형물과 함께 멋지게 지은 건물은 2014년에 준공한 벌교 꼬막웰빙센터다. 상가와 전시장, 체험관등이 있는데 기대와는 달리 활성화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다.
"벌교 빛을 즐기다" 조형물, 뻘배를 타는 모습을 새겨 넣은 작품까지 강변 산책로는 문학관과 미술관을 걷는 느낌이다.
산책로 한쪽을 채운 작약이 수줍게 꽃을 피웠다. 모란과 늘 혼동하지만 이제는 화초는 작약, 나무는 모란이다.
길은 옛 부용교 아래를 지나 홍교로 향한다. 조금 있으면 지나갈 벌교 홍교와 더불어 이 다리 또한 근현대사의 슬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다리다. 일제 강점기인 1931년에 세워졌는데 당시가 일본 천황의 연호로 쇼와(소화) 6년이었다고 여전히 소화다리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이 다리를 건너면 소화가 잘 된다고 소화다리라 했나? 하는 우스개 생각을 했었다. 그렇지만, 우스개 소리에 어울리지 않은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 바로 저곳이다. 지금은 난간이 있지만 해방 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를 조달한다고 쇠 난간도 뜯어갔기 때문에 난간이 없었다고 한다. 그 난간이 없었던 저 다리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하며 여순 반란사건을 일으킨 14 연대가 벌교를 장악했을 때는 수많은 우익인사들이 저 다리에서 죽었고, 반대로 토벌군이 들어온 다음에는 좌익을 처형한 곳이다. 난간이 없으니 총살을 하면 사람들은 강물로 그대로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누가 우익과 좌익을 구분하고 판단한다는 말인가? 그 갈등이 21세기인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니 정말 안타깝다.
강건너에 채동선 선생을 기리며 설립되었다는 채동선 음악당도 보인다. 340여 석 규모로 지역민을 위한 공연들이 열린다고 한다.
벌교를 북에서 남으로 가르며 내려가는 벌교천을 돌아본다. 남쪽으로 부용교와 미리내교가 보이고 북쪽으로는 부용산 자락을 배경으로 벌교 홍교가 눈에 들어온다.
소설 태백산맥에 자주 등장하는 홍교를 건넌다. 조선 영조 때 만들어진 보물이다. 홍교라 해서 색깔과 연관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다리 아래를 반원형으로 만든 아치형 다리를 홍교라 하고 홍예교, 무지개다리라고도 지칭한다. 홍교가 놓이기 전에는 뗏목을 이은 다리가 있었는데 그래서 지명이 벌교가 되었다고 한다.
홍교를 건너기 전 우측으로 가면 빨간 벽돌로 외벽들을 장식한 봉림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김범우의 집이 있다. 어릴 적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인민군이 되어 돌아오는 인물이다. 미군 통역, 교사, 남로당 공작원등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 봉림마을에는 벌교와 순천에 걸쳐있는 제석산(561m)을 오르는 등산로도 있다.
홍교를 지나면 채동선 생가를 향해 시가지를 걷는다. 소설 태맥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벌교 시내를 얼마나 다녔을까 상상해 본다. 기사를 찾아보니 6년에 걸친 집필 과정에서 스물다섯 번이나 벌교를 답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벌교를 걷고 나서 소설을 읽으면 장면장면이 더욱 생생하지 않을까 싶다.
안내판에는 채동선 생가와 함께 부용산 M1 고지가 함께 등장한다. 남파랑길은 채동선 생가를 지나면 193미터의 부용산 정상을 오르지는 않고 작은 언덕에 있는 공원을 오른다.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채동선. 내게 친숙한 것을 찾아보니 이동원, 박인수가 함께 부른 가요 "향수"는 정지용 시, 김희갑 작곡인데 이에 앞서 정지용 시에 채동선이 작곡한 가곡 향수가 있었다. 또 다른 가곡 "망향"과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채동선의 대표작이다.
부용산 M1 고지로 오른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었고 해방 후 공원이 되었다. 소설 태맥산맥에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마을에 들어온 계엄사령관 심재모가 이곳에 지휘소를 세우고 M1고지라 이름한다.
철쭉이 활짝 핀 공원길을 오른다.
M1 고지에 오르면 채동선 음악당, 벌교천 강변 산책로를 비롯한 벌교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남파랑길은 가지 않지만 충혼탑과 채동선 묘소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부용정이란 정자를 만나는데 그곳에서는 더 좋은 전망을 만날 수 있다.
공원을 내려가는 길에는 벌교 월곡 영화마을에 대한 안내가 서 있다. 월곡 영화마을은 벌교 초등학교 뒤쪽에 있으며 담벼락을 따라 다양한 영화 장면들이 그려진 벽화 마을이다.
산을 내려가는데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한다. 남파랑길은 녹차 밭을 지나지 않지만 "녹차수도 보성"이라는 문구가 눈에 훅 들어온다. 벌교 읍내의 뒷산인 부용산의 안내도를 뒤로하고 태백산맥 문학길을 따라 시가지를 걷는다.
태백산맥 문학 공원도 지난다. 과장이기는 하지만 소설 작품 하나가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느낌이다.
청년단 자리를 가리키는 표식이 있는데, 청년단 또한 소설 태백산맥에 자주 등장하는 장소로 염상구라는 인물의 아지트와 같은 곳이었다. 소설이지만 벌교를 걸으면 그 소설이 실재가 된다.
옛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벌교 금융조합의 모습. 인증숏 하나 남기고 간다. 소설에서는 조합장 송기묵이 등장하는데 일제강점기부터 이곳에 근무하며 치부를 하지만, 결국 좌익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부동산과 재테크에 열 올리는 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수많은 송기묵이 부활한 것 아닌가 싶다.
높이 제한을 경고하는 표지판에도 꼬막이 붙어 있다. ㅎㅎ
근대식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목공소, 학원, 식당, 미용실, 옷가게 등 다른 지역 읍내와 같이 있을 것은 다 있다. 소설에서는 남도여관으로 등장하는 보성 여관도 지난다. 현재도 숙박업을 운영하고 카페도 운영한다.
아침에도 국밥이었는데 저녁도 돼지국밥이다. 월요일이라 쉬는 식당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돼지국밥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하룻밤 휴식 후 내일 63코스 나머지 걷기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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