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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피랑과 충렬사를 거쳐 서피랑에 도착한 남파랑길 29코스는 서피랑 공원을 내려가 도천동을 지나 통영 운하를 따라서 길을 이어간다.
서포루로 올라가는 길의 벽면에는 소설가 박경리의 어록들이 색칠하지 않은 시멘트 벽면에 날것처럼 새겨져 있다. 예술이란 화려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시멘트 벽면에 새기고 싶은 것이 작가 박경리의 글이니 그 글이 주인공이 되게 하는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다. 다음은 글들 중의 일부다.
창조적 삶이란 자연 그대로, 어떤 논리나 이론이 아닌 감성입니다.
지성이나 의지가 창조적 삶을 살게 한다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인생을 창조적으로 산다는 것은 희귀한 일입니다.
편의주의나 보편적 규칙은 있을지언정 순수한 것은 아닙니다.
창조는 순수한 감성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서피랑 마을 전경을 보고 박경리 작가의 이런저런 말도 읽다가 소설가의 꿈을 꾸며 독립하여 글쓰기 하고 있는 딸아이가 생각난다. 글쓰기 특히, 창조 작업인 소설 쓰기가 결코 간단한 노동이 아님을 알기에 그저 마음으로 응원할 뿐이다.
서포루에 오르니 서피랑으로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인증 사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이곳도 사람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동피랑에 비하면 훨씬 여유가 있고 전망도 훌륭하다.
좌측으로는 강구안 해안과 함께 시내 건너편 남망산의 통영 시민 문화 회관과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피랑 바로 앞으로는 통영항 여객선 터미널이 보이고 바다 건너편으로는 미륵도에 자리한 중소 조선소들이 보인다.
가까이는 서피랑 멀리는 도천동과 충무교가 보이는 전경이다.
길은 산을 넘어 서피랑 공원을 벗어나 중앙로 방면으로 내려간다.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오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간다.
피랑이 벼랑을 의미하는 사투리라고 하던데 서피랑이라는 이름답게 엄청난 절벽길이다.
중앙로로 내려온 남파랑길 29코스는 우회전하여 통영 적십자 병원과 서호 시장을 지나 서쪽으로 이동한다. 적십자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공공 의료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거점 병원과 재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 통영을 비롯하여 서울, 인천, 상주, 거창, 영주에 적십자 병원이 있다.
중앙로를 걷다가 만난 근대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해방 직전 1943년에 통영 군청 건물로 세워져 근대 문화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는 건물이다. 2013년부터 통영 시립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로 인도를 걸어가면서 만날 수 있는 핵심 단어라 하면 윤이상 아닐까 한다. 도천 음악 마을 표지판도 그렇고 인도에 새겨놓은 인근 학교들의 교가를 보아도 온통 작곡가 윤이상이다. 통영 지역 학교 대부분의 교가를 윤이상이 작곡했다고 한다.
얼마가지 않아 바로 윤이상 기념관을 만난다. 많은 이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통영 국제 음악제도 그의 음악을 기리는 음악 축제이다. 클래식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음악을 잘 알지 못하고 이름조차도 친숙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저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적용한 독창적인 작곡가라는 평가로 그를 접할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반공을 내세운 독재 정권 아래서 간첩으로 몰려 사형 선고를 받았었고 한동안 그의 음악은 연주조차 못하게 했었다.
이념은 제쳐두고 음악을 사랑하고 고향 통영을 사랑했던 윤이상을 되돌아보는 기회였다. 2006년 국가 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던 동백림 사건이 중앙정보부가 당시 6·8 부정 선거에 대한 여론의 반대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대규모 간첩 사건으로 과대 포장한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여전히 그 이념의 부스러기를 가지고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는 이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세상이니, 과연 이 땅에 통일은 올까? 통일이 되면 과연 이 이념 갈등은 사라질까? 하는 허망한 의문이 든다.
동양 최초의 해저 터널은 바다 아래를 지나서 미륵도로 이어지므로 터널을 지나서 남파랑길을 이어가려면 미륵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거나 충무교로 건너와서 길과 합류해야 한다. 길은 해저 터널 옆길로 이어진다.
해저터널 옆을 지나면 윤이상의 깊은 흔적이 배어 있는 도천동을 지나 당동으로 넘어간다.
통영 운하를 따라가며 충무교와 통영 대교 아래를 차례로 지난다.
물결을 일으키며 지나는 배를 보니 마카오에 베네치아를 본떠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운하길이 연상되고 홍콩의 빅토리아 하버도 떠오른다.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는 것은 운하 인근의 경치 때문에 부르는 것이라 한다.
일제 강점기 이전만 해도 이곳은 썰물 때만 갯벌이 드러나는 얕은 곳이어서 배는 다닐 수 없고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다리를 놓아서 다녔는데 이곳 출신의 한 거부가 돌다리를 세운 것이 마지막이다. 그렇지만 좀 더 원활한 물자 수송을 원했던 일제는 배가 다닐 수 있는 운하를 파기로 결정하고 약 5년에 걸쳐 공사를 했다고 한다. 이때 운하와 같이 만들어진 것이 해저 터널인 것이다. 다리 대신 터널을 만든 것이다. 충무교가 해방 후 1967년에 개통했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미륵도와의 통행은 해저 터널과 뱃길이 전부였을 것이다.
운하길을 되돌아보며 이곳의 옛 풍경을 상상해 본다. 지금이야 사각형의 아파트와 호텔들이 이곳의 스카이라인도 바꾸어 놓았지만 도시의 삭막함 보다 통영의 아름다움이 기억으로 남는 도시가 되기를 바라본다.
통영 대교 아래를 지나니 바다가 넓어지며 바다 건너편으로는 배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는 미수항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통영 운하를 지나면 통영 해안로 도로를 따라서 해안길을 이어간다.
야자수가 가로수로 심어진 해안 도로다.
해안도로 끝 경상대학교 해양 과학 대학 입구 앞에서 좌회전하면 이름도 특이한 천대국치길 도로를 따라 걷게 된다. 천대받는다 혹은 나라의 국치라는 부정적이거나 피상적인 의미는 아니고 국치 마을, 천대 마을을 잇는 길로 천수답 논이 있는 골짜기 마을, 명당 지형을 가진 고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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