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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올레길 걷기에서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계획을 대폭 축소하여 올레길 7코스 중간부터 역방향으로 걸었던 적이 있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 당시 걷지 못했던 7코스 나머지를 순방향으로 걷고 8코스 초반에 있는 숙소까지 조금 더 걸을 예정이다. 우선 서귀포 여고에서 숙골을 거쳐 법환 포구에 이른다.

 

오전에 올레길 21코스를 끝낸 우리는 무더위에 파김치가 된 상태로 옆지기가 근처 편의점에서 구입한 음료수를 거나하게 들이켜고 종달 초등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201번 시내버스를 올라탔다. 긴 시간의 이동이니 만큼 급행을 타고 환승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조금 늦더라도 서귀포 여고까지 한 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선택했다. 거의 2시간에 육박하는 긴 이동 시간에 버스를 거칠게 모는 기사님 덕분에 깊은 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넉넉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외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두 여성이 우리 앞 좌석 앉았는데 우리의 땀냄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리에게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풍기는 까닭이었는지 우리를 돌아보더니 자리를 옮겨 앉았다. 괜히 민폐를 끼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튼 좋은 휴식 시간이었다. 덕분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올레길 7코스를 시작할 수 있었다.

 

서귀포 여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하차하여 학교 앞을 지나 호근 위생 처리장 방면으로 좌회전하여 숙골 방면으로 이동한다. 호근 위생 처리장은 서귀포시 12개 동에서 발생하는 분뇨와 정화조 오니를 처리하여 슬러지를 퇴비화 시설의 부재료로 공급하고 폐수는 색달 하수 처리장과 연계 처리하여 바다로 내보내는 것은 없다고 한다. 

 

숙골로 내려가는 길, 하늘은 야속하게도 강렬한 빛으로 걷기 초반부터 길이 쉽지 않을 것임을 경고한다. 오후 두 시를 바라보는 시간, 강렬한 태양은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지만, 갈길이 먼 우리는 드문 드문 나타나는 그늘에 감사하며 길을 이어간다.

 

한 집에서 심은 능소화가 담을 넘어 길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담쟁이 같은 덩굴성 목본 식물이다.

 

쭉쭉 뻗은 야자수들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륜동 올레길에 들어선다. 입구에 있는 스토리 우체통 중에서 녹색 우체통은 받지 못할 이에게 붙이는 편지고, 나머지 미락원, 가족애, 우정, 지고지순, 대의라는 이야기가 있는 빨간 우체통에 엽서나 편지를 넣으면 1년 후에 편지를 부쳐 준다고 한다. 예전에 아이들과 함께 원동역에서 1년 후에 도착하는 엽서를 쓴 적이 있는데 실제 엽서를 받아보면 추억과 함께 감회가 새로웠었다.

 

다리를 통해서 속골천을 건넌다. 이곳에는 속골 유원지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맑은 속골천 물에서 시원한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바로 앞이 바다지만 그늘도 있는 시원한 민물 놀이가 더 좋은 모양이다.

 

속골 앞바다에는 범섬이 외로이 여름을 견딘다.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범섬이라 불렀다고 한다. 섬 주위는 깎아지른 주상절리 절벽으로 섬 자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속골 유원지를 뒤로하고 거대한 야자수 동산 길을 따라 길을 이어간다.

 

백년초 군락지를 만났다. 지금 한창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시기인 모양이다. "백가지의 병을 고쳐주고 백 년까지 살 수 있게 한다"라고 붙여진 백년초라는 이름답게 제주의 선조들은 다양한 증상에 백년초를 민간요법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우리가 가야 할 아름다운 해안길 수봉로를 앞두고 마음을 다잡아 본다. 수봉로는 원래는 염소가 다니던 길이라고 한다. 올레길 생성 초기 김수봉이라는 분이 염소가 다니던 길을 삽과 곡괭이로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었다고 해서 수봉로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수봉로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시간 속에서도 때로는 숲길로 때로는 자갈길로 지루할 틈이 없는 즐거움을 선사한 길이었다.

 

서귀포 대륜동 해안은 끝내주는 풍경화 한 폭을 우리에게 내어주고 있다. 파란 하늘, 녹음 가득한 나무, 흰구름, 시커먼 몽돌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는 바다와 자연조명까지, 잠시 멈추어 서는 것만으로도 그야말로 걸작을 만난다.

 

수봉로를 지나면 포장길을 통해 법환 포구로 길을 이어간다. 칸나가 길목에서 눈길을 끈다.

 

칸나는 열대 아시아가 원산지인 여러해살이 풀로 여름부터 가을까지 개화 기간이 길어 화단에 많이 심는 식물이다. 제주에서는 노지 월동이 가능하지만 육지에서는 가을에 캐서 저장했다가 봄에 다시 심어야 한다.

 

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길이 반가운 것은 좁지만 그늘이 있다는 것, 나무 병풍 옆으로 바싹 붙어서 햇빛을 조금이나마 피해 본다.

 

다시 해안으로 나오니 서귀포의 아름다운 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쪽으로는 서귀포항 인근의 새섬과 문섬, 서쪽으로는 범섬까지 눈 호강하는 시간이다.

 

범섬 앞으로 시야를 가리는 긴 방파제가 법환 포구에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법환 포구에 도착하면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넉넉한 그늘로 우리를 반겨준다. 법환 포구를 "막숙개"라고도 부르는데 고려 공민왕 당시 최영 장군이 이곳에 막사를 치고 목호의 난 잔당을 물리쳤다는 데서 유래한다. 목호는 원나라의 말목장이 있던 제주도에서 말을 키우던 몽골족의 목자들을 지칭하는데 1백여 년간 제주에서 강한 영향력 끼쳤다고 한다.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명의 요구에 따라 토별 작전을 수행한 것이었다.

 

소나무 아래 쉼터에서 잠시 목을 축이며 쉬어간다. 올레길도 포구 아래로 내려가지 않고 소나무 쉼터를 거쳐서 법환 포구를 넓게 돌아서 간다. 쉼터에서 신발을 벗고 쉬고 있으니 포구로 횟집에 바닷물을 배달하는 차량이 오더니 펌프로 물을 담아가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해안가에 있는 횟집이야 해수를 바로 끌어다가 수조의 물을 순환시켜주면 되지만 그런 환경이 어려운 곳은 트럭으로 해수를 갈아주어야만 한다. 주기적으로 해수를 갈아 주지 않으면 물을 순환시키면서 모래 등으로 걸러주더라도 물고기들의 배설물과 입으로 내뱉는 불순물 때문에 거품이 일어난다고 한다. 거품이 일어나면 수조 관리가 엉망이라고 고객들이 줄어드니 소포제라는 화학 약품을 뿌리기도 하는 것이다. 

 

법환 포구 옆 동가름물/서가름물에서는 독특한 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마을 주민이나 수많은 고려 병사들이 식수로 사용했을 용천수에서 사람들이 신나는 물놀이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나도 바로 들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가름은 마을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라고 한다.

 

법환 포구 바로 옆에는 조각 작품들이 세워져 있는 법환 해녀 광장이 있었다. 올레길을 걸으며 여러 해녀상을 만나지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해녀상이었다. 한 손으로는 테왁을 둘러메고 다른 한 손에는 물고기를 잡은 꼬챙이를 들고 있는 옛 해녀옷을 입은 강인한 모습의 해녀상이었다. 누군가 목에 걸어준 손수건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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