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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해파랑길 37코스와 강릉 바우길 7구간은 동막 저수지를 지나 어단리를 거쳐 굴산사지 당간 지주를 들러 오독떼기 전수관에서 여정을 마치는 것이었지만 동막 저수지 앞에서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결국 휴대폰의 맵에 의존해서 길을 찾아갔는데 맵 정보 자체가 최신이 아니라서 그만 이전의 해파랑길 경로로 가고만 것이다. 금광 초등학교를 지나 굴산사지 당간 지주에서 현재 경로와 만나는 방식으로 걸었다.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표식을 보면서 길을 찾아 가지만 오로지 표식에만 의존하면 길을 헤맬 수도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은 순간이었다. 숲길을 내려와서 처음에는 표식을 따라서 이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는 한동안 하천변 길을 걸었는데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아무런 표식이 나타나지 않았다. 인쇄해온 지도를 보아도 앱을 열어 확인해도 길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앱에 준비한 경도는 옛 경로라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표식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는데 다시 천천히 보아도 정확한 경로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현재 경로 찾기를 포기하고 옛 해파랑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첫 번째 다리를 건너고 50미터 내외의 거리에서 다시 다리를 만나는데 다리를 건너서 바로 좌회전하여 하천변을 따라 남강릉 IC까지 쭉 걸어 올라 갔으면 될 일이었다. 큰 이정표인 저수지에 도착하기 전에 길을 대강은 파악할 필요가 있었고 귀찮다고 앱에 경로 정보를 업데이트하지 않고 여행을 떠난 결과를 호되게 당한 셈이었다.

 

옛 해파랑길이 아래쪽에서 금광천을 건너므로 하천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옛 해파랑길을 만난다. 야속하게도 태양은 그늘 하나 없는 들판을 걷는 두 사람을 강렬하게 내리쬔다. 초봄이지만 입술은 바싹 마르고 12Km를 넘는 거리를 걸은 이후라 발걸음은 무겁다. 뒤를 따라 걷는 옆지기는 말로 욕을 하지 않았지, 터덜터덜 발걸음과 표정은 짜증 가득이다. 그러나, 어쩌랴! 길을 헤맨 원죄가 있으니 눈치 보며 조용히 걷는다. 금광천은 하류에서 섬석천을 만나 동해로 흘러간다.

 

해파랑길 표식이 붙은 다리를 만났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보면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표식이 없다. 바뀐 현재의 해파랑길이란 확신도 없고 앱으로 현 위치를 확인하면 옛 해파랑길 37 코스는 한참을 더 내려가야 한다. 옆지기의 짜증이 표정으로는 곧 폭발할 것 같다. 멀리 동막 저수지의 모습을 뒤로하고 길을 이어간다. 먼 훗날 길을 헤맨 것도 추억이 될 것이다.

 

금광천 하천변을 따라 더 내려가니 색 바랜 해파랑길 스티커가 붙어 있는 다리를 만난다. 드리어 옛 해파랑길 37 코스를 만난 것이다. 앱을 보니 현재 위치도 옛 경로와 일치한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앞에서 금광 초등학교를 만난다. 해방 직전에 세워진 유서 깊은 학교인 만큼 커다란 나무들이 교정을 감싸고 있는 학교였다.

 

금광 초등학교 앞 도로에서 좌회전하면 학교 모서리에서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도로를 가로질러서 학교 옆 울타리를 따라 길을 이어간다.

 

금광 초등학교 옆길을 지나면 수로길을 따라 북쪽으로 금광리 마을길을 걷는다. 남서방향으로 높은 산들을 바라보며 걷는 길로 830미터의 매봉산이 자리하고 있다. 고봉 아래로 넓게 펼쳐진 들판을 걸으며 이곳도 살기에 참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금광리 마을 이름의 유래 중에 하나는 마을에 있는 용금정이라는 우물과 연관이 있다. 용이 올라갔다는 전설이 있는 샘으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 우물의 물빛에서 금빛이 난다고 금광리라 불렀다는 유래다.

 

마을길에서 37코스의 종점인 학산 마을과 굴산사 당간 지주 표지판을 따라 우회전하여 서쪽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늘 하나 없는 들판에서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을 온몸으로 그대로 받아야 하는 들판 길이다.

 

서쪽으로 이동하다 보면 7번 국도와 동해 고속도로를 이어주는 칠성로라는 도로를 만난다. 도로를 만나 좌회전하여 조금 더 내려가 도로를 건너서 "학산 문화 역사 마을" 표지판이 있는 곳으로 길을 이어가면 된다. 이곳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이스바와 음료수를 구입해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옥봉안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이곳에서 37코스의 종점인 오독떼기 전수관으로 가는 안내판이 있지만 해파랑길은 굴산사지 당간 지주 방향으로 우회전해야 한다. 옥봉 마을 표지석을 지나 굴산사지 당간 지주 표지판에서 좌회전한다.

 

통신 신라시대 문성왕 당시 세워졌던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당간 지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한다. 보물 86호다. 사찰에 행사가 있으면 깃발에 장대에 달아서 표시하는데 이 장대를 당간이라 하고 당간을 양쪽에 지탱해 주는 것을 당간 지주라고 한다. 당간 지주 사이에 커다란 장대를 세우고 당간 지주를 이용해서 장대를 단단하게 붙들어 주는 것이다.

 

굴산사지 당간 지주를 떠나가는 길에서는 신식 허수아비들이 길을 맞는다. 참새들도 무시하는 허수아비지만 여행자들에게는 휑한 들판에서 사람만큼이나 반갑다.

 

학산리 마을길을 지나 굴산교를 통해서 어단천을 건너 좌회전하면 오늘 여정을 끝낼 수 있다. 원래 해파랑길 38코스는 굴산교에서 우회전하는 방향으로 이동하지만 특이하게 좌회전하여 오독떼기 전수관으로 내려갔다가 다음 코스에서 얼마 되지 않지만 이 길을 다시 올라오는 코스이다.

 

굴산교에서 바라본 어단천 상류 방향의 모습이다. 어단천을 따라 올라가면 상류 어단리에 칠성 저수지가 있다. 953미터에 이르는 칠성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모이는 곳이다.

 

커다란 소나무가 길 양쪽에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곳에 학산 마을비가 세워져 있다. 학산리는 예전에는 굴산리라고 불렀는데 마을 뒷산에 학들이 소나무 위에 둥지를 틀면서 학산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길 건너에는 학산 서낭당(성황당)이다. 매년 음력 5월 5에 열리는 강릉 단오제의 유적지이다. 강릉 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축제로 유네스코로부터 "인류 구전 무형 유산 걸작"으로 선정된 지역 축제이다. 음력 5월 5일은 양기가 가장 센 시기로 모내기 등을 끝내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때였다고 한다. 농경 사회 문화의 하나인 단오가 현대인들에게 차츰 사라져 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리베기, 모내기 등 일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농촌에서 단오를 통해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시 쉬어갈 줄 아는 조상의 지혜가 엿보인다. 강릉 단오제라는 단어 자체에서 제사를 인식할 수 있는데 강릉 단오제의 주신이 김유신이라는 말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굴산사를 창건했다는 범일국사이고 학산 서낭당 뒤편으로는 2016년에 굴산사지와 관련된 학술 발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드디어 해파랑길 37코스의 종점인 오독떼기 전수회관에 도착했다.

 

앞마당에서 멋있는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오독떼기 전수회관을 처음 만났을 때는 오독떼기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상상의 나래를 펼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공예품이나 음식일까? 하는 상상도 했었다. 알고 보니 강릉 일대에서 전승되던 농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농요를 전수하는 곳이니 당연히 눈에 볼 수 있는 실체가 있을 리 만무했다. 논의 잡초를 뽑는 김매기를 하면서 함께 부르던 노래라고 한다.

 

강릉이라 경포대는 관동팔경 제일일세
머리 좋고 실한 처녀 줄뽕낭게 걸 앉았네
모시적삼 젖혀들고 연적 같은 젖을 주오
맨드라미 봉선화는 동헌 뜰에 붉었구나
연줄가네 연줄가네 해달 속에 연줄가네
오늘 해도 거즌 갔네 골골마둥 정자 졌네
이슬 아침 만난 동무 석양 참에 이별일세

 

지금이야 이앙기로 모내기를 하고 제초제로 잡초의 싹을 없애는 논농사로 손 모내기도 김매기도 없어졌지만, 필자처럼 자그마한 논에 직접 모를 심고 잡초를 뽑는 사람이라면 김매기의 어려움은 손뼉을 치며 공감할 것이다. 그것도 추수 때까지 김매기를 서너 번은 해야 하니 그 고역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공감할 수 없는 고역인 것이다. 그런 고역을 함께하며 노래라도 불렀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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