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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MB 1일 차 숙소는 트휙 산장(Auberge du Truc, 1,750m)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지리산의 산장이나, 설악산의 산장에서 머문 적은 있었지만 나이 들고, 그것도 부부가 함께한 산행에서, 그것도 알프스의 산장에서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데, 출발 전부터 걱정 반, 기대 반이었습니다.

 

저희는 28명이 같이 묵는 숙소에 식사(하프 보드) 없이 숙박만 1인당 16유로에 예약했는데 어차피 샤워는 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하면 묵을만했습니다. 샤워는 할 수 없었지만 여러 명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세면실이 바로 옆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오후 4시쯤 산장에 도착하니 벌써 도착해서 씻고, 정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2층 침대가 여러 개 배치되어 있는 구조인데 특이하게도 한 칸에 두 명씩 눕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 구조를 모르고 주인이 업, 다운을 선택하라고 할 때 옆지기는 위, 저는 아래에서 자겠다고 했습니다. 주인은 속으로 커플로 온 사람들이 뭔 소리야? 했을 것 같습니다. 둘 다 위로 가거나 둘 다 아래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들어가서 침대를 보니 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행이죠 1층에 옆지기와 나란히 누워 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미리 매트와 베개, 이불이 준비되어 있는데 매트 위에 가져온 경량 침낭을 깔고 그위에 이불을 덮으니 조금 쌀쌀해도 잘만 했습니다. 

 

미소가 아름다운 산장지기는 이것저것 안내해 주시더니 가벼운 미소로 오늘은 좋은 날이었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저의 대답은 오늘 하루를 총 결산하는 말이었습니다. 최고의 풍경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오늘이야말로 "원더풀 데이"라고 답해 주었습니다.

 

산장에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저녁시간까지 맥주를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저희 커플은 침대에 누워 잠시 쉬기로 했습니다. 숙소 한쪽 구석에는 어른들 술자리에 끼지 못하는 프랑스 아이 두 명이서 시시덕거리며 속삭이는 소리로 뭔가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입니다. 가족 단위로 TMB에 도전하고 있는 모습들이 참 보기 좋았습니다. 할아버지, 큰 아버지, 작은 아버지와 그 아들들 3대의 남자들만 총출동한 가족도 있고, 엄마, 아빠와 두 아들이 함께 묵는 가족도 있고, 성인이 된 형제 부부들이 으쌰 으쌰 해서 모인 그룹도 있었습니다.

 

오후 5시가 조금 넘는 시간 가끔은 구름이 해를 가려 서늘하기도 하지만 따스한 햇빛이 비추이는 잔디밭 벤치에 앉아서 여유롭게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뭉클합니다. 몇 분 전에는 소들이 요란한 워낭 소리를 내며 우리로 들어갔었는데, 어느새인가 방금 짠 우유를 실은 작은 트럭 한 대가 산 아래로 내려갑니다.

 

우유를 싣고 운반하는 작은 트럭입니다. 비포장 산길을 통해 운반하려니 우유 탱크도 앙증맞다고 해야 할까요? 이 또한 오랜 시행착오 끝에 고안해낸 방법일 것입니다.

 

알프스의 풍경 속에서 글쓰기를 시작했을 헤르만헤세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상상해 봅니다. 주변에는 하얀색, 보라색, 노란색 야생화들이 바람에 하늘거리고, 등을 돌려 올려다보면 7월 한 여름 태양빛에도 녹지 않고 서슬 퍼렇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빙하를 품고 있는 설산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하루 종일 몽블랑 투어를 하고 있는 경비행기 소리가 이따금씩 지금이 2019년 임을 잊지 않게 해 주지만, 끊이지 않는 소들의 워낭 소리는 오늘 밤 깊은 잠을 자게 하는 묘약 일지, 아니면 독약 일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트휙 산장은 해가 있을 때는 조금 멀리 떨어진 야외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하고, 해가 지면 실내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목에 있다 보니 나름의 배려인 듯싶습니다. 다행인 것은 야외 화장실 치고는 깔끔했습니다. 톱밥을 이용하는 친환경 화장실로 냄새도 없고 괜찮았습니다.

 

저녁식사는 샤모니에서 구입한 가스 연료로 물을 끓여서 수프를 먼저 해 먹고 즉석밥과 컵라면으로 해 먹었습니다. 방금 전에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한국말로 대화를 했던 분의 일행이 저녁을 일찍 먹었는지 설거지를 하고 텐트로 돌아갔습니다. 대화를 나눈 분은 여행을 준비하다가 한국에서 팔을 다치셔서 깁스를 했는데, 한쪽 팔을 다치신 채로 산행을 하고 계셨습니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가고 싶은 곳은 다녀와야 한다고......

 

산장에서의 밤은 그럭저럭 잘 만 했습니다. 출입문 바로 옆이라 춥거나,  너무 시끄러울 것을 염려했는데 문안에 커튼이 있어서 한기가 많이 들어오지는 않았고 워낙 많은 인원이 한 공간에서 자는 거라 코도 골고 이런저런 소리도 끊임없지만, 피곤했는지 옆지기와 저 모두 잘 잤습니다. 자는 사람이 있으면 모두들 조심하려고 배려하는 모습들이 보기 좋았습니다. 어스름한  이른 아침 산장 주위 텐트들은 아직 고요합니다.

 

아침도 코펠에 물을 데워 즉석밥으로 식사를 든든히 챙겨 먹고 커피까지 즐긴 다음 TMB 이틀째 산행을 시작합니다. 어제 산장에 겨우겨우 도착해서 몸이 좋지 않아 말없이 침대에 누웠던 옆지기도 하룻밤 사이에 회복되어 걸을 만하다니, 얼마나 다행인지요. 식사를 하면서 들었던 생각인데 알프스에 사는 소들에게 한국 음식 냄새는 과연 어떨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장을 떠나 레 꽁따민느(Les Contamines)로 내려가는 길에서 뒤돌아 산장을 바라보니 산너머로 붉은 태양의 기운이 서서히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아주 맑은 날씨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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