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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호산 자락의 고개를 넘어 강계마을로 내려온 길은 죽림마을을 지나면 다시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한다. 옛 서해랑길은 해변을 돌아 탑립마을을 거쳐갔지만 지금은 진도대로 도로와 도로 인근의 길을 따라 여귀산 자락을 걷는다. 강품미재 고개에서 도로를 벗어나 보덕산 임도로 들어서고 산을 내려와 귀성마을을 지나서 귀성삼거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봉호산 자락에서 내려온 길은 강계마을 외곽을 지나 죽림마을로 향한다. 강계마을 앞바다는 접도라는 섬이 커다란 방파제 역할을 하는 모양새다. 접도는 다리로 의신면 금갑리와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길을 걷다가 그만 젖은 흙에 미끄러져 바지가 흙투성이가 되고 말았다. 다치지 않아 다행이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넘어지는 것은 추운 날씨에 몸이 굳은 까닭일까? 나이 때문일까? 왠지 씁쓸하다.

 

해변으로 내려오니 무지개색으로 단장한 해안 방호벽이 분위기를 밝혀준다. 북쪽부터 차례로 강계마을, 죽림마을, 동헌마을이 이어진다.

 

해안 끝자락에 있는 동헌마을로 들어가는 교차로에 있는 마을은 죽림 어촌 체험마을로 독살도 있고 조개잡이 체험장도 있지만 마을 갤러리와 카페들도 있었다. 바람이 엄청 세게 불고 있지만 먼바다를 막고 있는 접도 덕분일까 앞바다는 잔잔한 호수 같다.

 

비와 진눈깨비가 적셔 놓은 땅에 추운 날씨가 겹쳐서 쉴 곳도 마땅치 않았지만 휴식 시간이 적었는지, 출발 지점 이후로 이곳까지 이동한 속도가 상당했다. 덕분에 뜨거운 커피 한잔 하며 쉬어갈 여유도 생겼다. 디저트를 함께 주문했는데 사람이 많이 없어서 인지 디저트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주인장에게 김밥을 먹어도 되냐고 물으니 그러라고 한다. 뜨거운 커피와 배낭에 남아 있던 김밥을 먹으며 꽁꽁 얼어 버린 몸을 녹이니 참 좋았다. 문제는 창밖 풍경이었는데 쏟아진 진눈깨비를 강한 바람이 이리저리 쓸고 있었다.

 

이른 아침 보슬비로 시작한 날씨는 폭설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직 길에 쌓이는 수준이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아직 갈길이 많이 남은 시점에서는 앞길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몸을 완전히 녹이는 것도 중요했지만 눈이 그치기를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부지런히 카페를 나서서 길을 이어간다.

 

길은 죽림어촌체험마을 안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서쪽으로 죽림마을을 향해서 이동한다.

 

수로를 올라가며 카페 골목과 다목적 회관을 지난다.

 

들판길로 접어드니 다시 세찬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땅에 쌓이는 것만 없을 뿐 강한 바람과 함께 쏟아지는 눈은 우리를 긴장시키고도 남는다.

 

죽림마을을 보면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길, 강한 바람을 타고 얼굴을 때리는 눈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집에서 떠날 때도, 오늘 새벽 목포를 떠날 당시만 해도 진도의 일기 예보는 오전에 잠시 비가 내리는 것이었고 강수 확률도 60% 정도였는데 실상은 하루 종일 비와 진눈깨비가 오락가락하다가 이제는 조금 허풍을 더해서 눈폭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뜻한 진도에서 이런 눈을 맞으며 걷다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죽림마을 북쪽으로는 작은 저수지와 여귀산 자락의 암봉이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은 어느덧 죽림마을을 뒤로하고 18번 국도 진도대로로 진입했다. 갓길이 넉넉해서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도로를 따라 서서히 여귀산 자락을 오르는 길, 날은 흐려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죽림마을과 앞바다 풍경이 일품이다. 강한 바람과 눈보라는 몰아쳤다, 쉬었다를 반복한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올 때면 멀리서부터 눈발이 비처럼, 안개처럼 흩어지기 시작하고 어느새인가 눈발이 우리의 얼굴을 때린다.

 

계곡을 지나는 도로를 걸어서인가? 잠시 잠잠하던 눈보라는 길이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다시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 시작한다. 길은 탑립마을로 이어지는 작은 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눈보라에 손은 시리고 몸은 고생이지만 이런 눈보라 속에서 언제 또 걸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도 든다. 산아래 계곡으로 이어진 탑립마을의 풍경은 흐린 날씨 속에서도 절경이다.

 

길은 탑립마을로는 내려가지 않고 국도 인근의 작은 길을 따라 이동한다.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가고 고도가 높은 산에서는 눈이 녹지 않고 쌓이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내일은 과연 어떻게 될지 생각하면 아찔하다. 예보는 그냥 흐리기만 하다고 했는데 예보와는 전혀 다른 오늘을 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듯하다.

 

길은 다시 국도와 합류한다. 이곳의 풀밭에 내린 눈들도 녹지 않고 쌓이기 시작했다. 오묘한 우연일까? 운명과 같은 우연일까? 도로변에 세운 김미경 시인의 "겨울 배추와 첫눈"이라는 시비를 만났다.

 

첫눈이 바닷바람에 휘날려 
온 천지를 진동한다

겨울 배추는 빼꼼히 눈을 뜨고
하얀 세상이 낯설어
부르르 몸을 떤다

첫눈이 내려도 나는 혼자 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고즈넉한
외딴집에 홀로 앉아
세상을 낯설게 쳐다본다

하얀 눈과 어울릴 수 없는
겨울 배추의 어색한 푸르름처럼
나는 그렇게 여기 앉아 있다.

시인은 눈 맞은 배추를 어색한 푸르름으로 표현하며 자신에 배추를 비유했지만 눈 맞은 겨울배추는 그 맛이 더한다고 하니 디저트에 맛을 더해주는 토핑처럼 느지막한 삶에 다가오는 다양한 위기와 어려움, 고난들을 모두 토핑처럼 녹여내는 넉넉한 마음의 삶이었으면 한다.

 

멋진 돌탑들이 세워진 안쪽 공간에는 전망 좋은 정자도 있었는데 진돗개들이 사납게 짖으니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시비와 독특한 탑들이 세워진 이곳은 여귀산 돌탑길이었다.

 

여귀산 돌탑길 끝자락, 탑립마을로 들어가는 교차로에서 서해랑길은 도로를 벗어나 보덕산 임도로 진입한다.

 

임도로 진입하면 오르막 도로를 걸으면서 고도를 높여 왔기 때문에 이제는 귀성리 쪽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벌써 우측 산아래로 귀성리의 저수지와 아리랑마을관광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등 뒤로는 바위 봉우리가 멋진 진도의 3대 명산이라는 여귀산(458m)이 든든하게 자리하고 있다.

 

보덕산 임도를 따라 산 중턱을 완만하게 내려가는 길, 능선 반대쪽이라 그런지 바람이 많이 불지 않는다. 계속 이런 길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잠시나마 바람이 잔잔한 길을 걸으니 좋다.

 

임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임도는 오봉산(201m) 등산로와 이어지는데 등산로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마을로 내려간다.

 

산 능선이 바람을 막아주던 구간을 지나고 나니 아니나 다를까 계곡을 타고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발걸음이 내디뎌지지 않는다. 멍하니 걸음을 멈추어 서서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지만 기약 없는 기다림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바람이 얼마나 강한지 서해랑길 리본도 눈보라도 거의 수평으로 날아다닌다.

 

마을로 내려오니 찬바람은 여전히 거세지만 코스 종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마음에 발걸음은 무겁지 않다.

 

돌담이 아름다운 귀성마을의 골목길을 통해서 큰길로 나간다. 앞바다에서 고기가 많이 잡히고 해산물이 풍부해서 황금리라고 불렸다는 마을이다. 그래서 귀성리의 마을 이름은 귀한 땅이라는 의미가 담긴 모양이다. 아리랑마을관광지와 한옥민박, 그리고 여귀산 자락에는 국립남도국악원도 자리하고 있다.

 

눈이 내리는 12월의 한복판에 마을길에서는 그야말로 동백꽃이 한창이다. 와우! 추위와 피곤에 지친 나그네에게 비타민 같은 풍경이다.

 

길은 커다란 장구 모양의 아리랑마을관광지 앞을 지난다. 8도의 아리랑과 진도 홍주를 체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세찬 강풍을 뚫고 길을 지나다가 옆지기에게 전깃줄에서 나부끼는 것을 가리키다가, 그만, 옆지기의 안경테를 망가뜨리고 말았다. 시력이 좋지 않은 옆지기를 데리고 이동하다 보니 안경을 쓰고라도 잘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별일을 다 경험하는 하루이다.  

 

귀성삼거리로 향하는 길에서 대파 수확이 한창인 현장을 만났다. 허리에 대파를 묶을 노끈을 차고 대파 수확에 한창인 사람들을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이 추운 날씨에도 허리를 숙이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인 근로자로 채워진 농산물 수확 현장의 모습에서 과연 우리나라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이 가질 않는다.

 

가지런히 놓인 싱싱한 대파 묶음을 보니 일꾼들의 일솜씨와 노고에 대한 생각과 함께 외국인근로자 입장에서는 날씨가 춥기는 하지만 수입 좋은 안정된 일거리가 꾸준하게 있는 것이 그들에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술인촌 전시관과 국립남도국악원이 위치한 귀성삼거리에서 사연도 많고 탈도 많았던 8코스 여정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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