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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저녁 복통과 설사로 몸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지만 MBC(Machhapuchhre Base Camp, 3,700m)와 ABC(Annapurna Base Camp, 4,130m)를 앞두고 일정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무거운 배낭을 내려두고 물과 초코바만 들고 가볍게 걸을 예정이기 때문에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MBC를 거쳐 ABC까지 갔다가 다시 데우랄리로 돌아오는 13Km에 이르는 여정입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입니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MBC까지는 3.63Km의 거리로 오르막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고도를 5백 미터 가량 올리는 코스이므로 천천히 걸어야 합니다.
오전 7시를 바라보는 시각, 산장 주변으로는 여명이 천천히 밝아 오고 있습니다. 저 멀리 산 아래로는 일출의 붉은 기운이 한창이지만 이곳은 산 그림자 아래로 여전히 어둑어둑합니다.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주인장에게 정산을 하자고 했더니 저희가 어제 속이 좋지 않아 점심도, 저녁도 건너뛴 까닭에 계산서가 없었습니다. 속이 아파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뜨거운 물만 시켰다고 하니 아저씨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파서 그런 건데 할 수 없지요. 그래도 ABC를 다녀오는 긴 여정을 소화해야 하니 뭔가 요기를 해야 되겠는데 옆지기도 저도 입맛이 없었습니다. 생각 끝에 혹시 쌀죽을 먹을 수 있냐고 했더니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쌀죽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지만 음식을 기다리며 이른 아침의 산장 주변 풍경을 돌아보았습니다. 오늘도 청명한 가을 하늘을 즐기며 걸을 수 있는 맑은 날씨였습니다. 오후 2시 정도부터 산장 주위를 가득 채우던 안개도 아침이면 어느새인가 물러나고 없었습니다. 산장 옆으로는 이곳이 물의 근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모디 계곡(Modi Khola)의 물소리가 거칩니다.
쌀죽은 길쭉길쭉한 이곳의 쌀이 그대로 있는, 정확하게 말하면 찬밥을 끓여 나온 것이었습니다. 속이 좋지 않은 저희 부부 둘이서 끓인 밥 한 그릇을 먹는데 그나마 먹을만했습니다. 맨밥을 끓였으면 더 좋을 뻔했는데 설탕과 소금 간을 했더군요. 아저씨가 계산서에 라이스 푸딩이라고 적은 것을 보면 이렇게 해서 먹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3천 미터가 넘는 고지대를 10Km 이상 걸어야 하는데 이 쌀죽과 물, 초코바로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어제 이틀 밤을 묵겠다는 사전 고지 덕택에 열쇠를 가지고 그냥 출발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저씨는 배낭을 데스크에 맡겨놓고 출발하라고 하시더군요. 말씀을 들어보니 단체 여행객들이 예약을 해서 방을 연속적으로 배정해야 하는데 저희가 걸린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 짐을 싸서 데스크에 배낭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산장을 나섰습니다. 위쪽으로 눈이 있냐고 아저씨에게 여쭈었더니 없다고 하셔서 아이젠과 스패츠 등의 장비도 모두 놓고 가볍게 길을 나섰습니다.
데우랄리에는 너 다섯 개의 게스트하우스들이 언덕 아래와 언덕 위로 나뉘어 자리하고 있는데 저희가 묵은 숙소는 샹그릴라 게스트 하우스(Shangrila Guest House)로 언덕 아래에 있는 숙소였습니다. 숙소가 있는 언덕 아래에서 보면 언덕 위로 뭔가 표식도 있고 깃발도 있어서 무슨 표식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냈습니다. 결국 가까이에 가서 보니 게스트 하우스 안내였습니다. MBC로 가는 경로는 저곳을 가로질러갑니다.
이른 아침, 계곡을 따라 MBC로 가는 방향은 높은 산봉우리들은 해를 받아 선명하지만 계곡 안은 여전히 산 그림자에 가려 어둑어둑합니다.
계곡을 따라 높은 바위산 아래를 지나는 경로이니 만큼 산사태 위험 지대(Avalanche Risk Area) 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습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을 받은 깃털 구름과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마차푸차레의 모습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데우랄리에서 MBC로 가는 길 또한 돌계단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깎아지른 바위산을 배경으로 한 작은 제단, 그 뒤로 보이는 마차푸차레가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고도가 올라갈수록 나무는 점점 적어지고 온통 겨울을 맞아 누렇게 옷을 갈아입은 들풀뿐입니다.
이곳의 식물들은 쌀쌀한 날씨만큼이나 가을을 한참 지나 한 겨울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 그 들풀들 사이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하얀 꽃을 만났습니다. 꽃을 피운 상태에서 추위를 맞아 그 자리에서 그냥 드라이플라워가 된듯한 모양새입니다.
MBC로 가는 여정은 계곡을 따라 걷다 보니 많은 경우 깊은 산에 가려 그저 길만 보고 걷게 되는데 이따금씩 시야가 확보되는 곳에 이르면 멀리 보이는 설산들의 모습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까지는 고봉들도 다른 산 그림자에 가려 제 모습을 모두 보이지 못하는 곳입니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3,700m)까지는 고도를 5백 미터 정도 올리며 걷는 길이지만 완만한 오르막이 많아서 걷기에 좋은 길입니다. 물론 어제부터 복통과 설사로 고생하고 있고 어제 점심 이후 쌀죽 먹은 것이 고작인 저희 부부에게도 힘들지만 선물과 같은 길이었습니다.
모디 계곡(Modi Khola) 물이 손에 닿을 듯한 거리로 길은 이어집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숲은 보이지 않고 그 자리를 깎아지른 바위산과 바위들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모디 계곡 양쪽의 고봉이 만들어 놓은 계곡 끝에 보이는 바위산 바로 앞으로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가 있고 그곳에서 좌회전하여 오르면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로 길은 이어집니다.
이건 빙하의 흔적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작년 눈이 녹지 않은 것일까요? 규모로 보면 빙하의 흔적으로 보입니다.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들 이곳에서 인증숏을 하나씩 남기더군요.
아이러니하게도 죽어가는 빙하 근처에는 꽃이 여전했습니다. 과연 이 꽃은 남은 꽃봉오리도 마저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산장에서 밤을 보낼 때는 워낙 추워서 밤새 바깥으로는 서리가 내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올라온 길을 돌아보면 천천히 천천히 걸었지만 아래가 아득히 보입니다.
길에서 깃발을 만날 때면 조금 있으면 산장들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 MBC가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힘을 냅니다.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복통과 설사를 이겨내고 쌀죽 하나 먹고 출발한 길에서 첫 목표를 달성하니 그저 아싸! 하는 기쁨과 감사뿐입니다.
드디어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MBC, Machhapuchhre Base Camp, 3,700m)에 도착했습니다. 천근만근한 몸과 빈속으로 데우랄리에서 MBC까지 3.63Km를 2시간 30분 만에 주파했으니 저희 같은 거북이걸음으로는 준수한 성적입니다.
MBC에 있는 산장에서 식사를 하거나 묵을 계획이라면 계단을 올라 산장으로 가면 되지만 MBC는 위의 지도처럼 산장들이 경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에 ABC로 바로 가는 경우에는 좌측 길을 통해 바로 ABC로 경로를 잡으면 됩니다. 이제 ABC까지의 마지막 도전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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