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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도착했던 로베르 블랑 산장(Refuge Robert Blanc, 2,750m)에서의 하룻밤은 감사와 3일 연속 산장에서 묵는 강행군의 피곤함 속에 잠을 잔 건지, 그냥 쓰러진 것인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물을 갈아먹어서인지, 체력 소모에 비해서 영양 섭취가 부실해서였는지 속도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산장에서의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인가 걸을 힘이 보충되는 것은 그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인 세이뉴 고개(Col de la Seigne, 2,520m)까지는 약간의 내리막과 오르막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한 고도입니다. 북쪽으로 글레이셔 침봉(Glaciers, 3816m)을 보면서 글레이셔 빙하(Le glacier des Glaciers)의 아래 부분을 가로지르는 난이도가 있는 구간입니다. 한국을 떠난 지 한 주를 보내고 새로운 월요일을 맞는 날입니다. 어려운 구간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로 접어들면 예약해둔 호텔에서 오래간만에 샤워도 하고 제대로 휴식할 수 있는 기대가 있는 날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한층에 4명씩 자는 2층 침대의 2층에서 나란히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지난밤 코를 골거나, 이를 갈아서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창밖으로 여명이 비추인 듯싶은 이른 시각 저희는 짐을 모두 챙겨서 식당으로 이동하여 출발 준비를 서둘렀습니다. 2,700m가 넘는 고도에 위치한 산장답게 쌀쌀한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버너를 준비하러 길에 바라본 산장 바깥 풍경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7월 한여름에 하얀 눈이 내려서 산장 주위가 온통 새하얗게 변한 것이었습니다.
하얀 눈길 사이로 두줄 짜리 등산로 표식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이젠도, 스패츠도 없는데 눈길을 갈 수는 있을까? 갈 수 없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온갖 생각이 들면서 그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 막막함 속에서 아침 준비를 위해 물을 끓이고 있는데 그런 걱정과 염려를 무색하게 하는 모습이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고령의 할아버지와 젊은 아가씨가 포함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른 조식을 챙겨 먹고 안전모와 아이젠을 착용하고 굵은 자일 더미를 둘러메면서 산장을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한 여름밤에 내린 눈과 흐린 날씨에 포위되어 막막하던 시야는 "그래 앞서 출발한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쫓아가 보자!" 하는 결심으로 한층 밝아졌습니다.
출렁다리 건너기, 체인 잡고 올라가기, 쇠줄 붙잡고 절벽 걷기 등 웬만한 클라이밍 코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의 코스를 통과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아침을 먹고 있는데 젊은 산장지기가 어제 숙박비에 붙는 세금 받는 것을 깜박했다고 동전을 몇 개 챙겨 갔습니다. 부담감 가득한 마음에, 산장지기에게 어제 너무 힘들었는데 오늘 우리가 세이뉴 고개까지 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더 쉬울 거라는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출발까지는 답답했지만 그 대답이 진실이라는 것은 겪어보니 알겠더군요. 조금은 특별한 코스였지만 여러 안전장치들이 있어서 통과하기 어렵지 않은 코스이기는 했습니다.
지난밤 눈보라에 표지판은 눈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막막한 마음이었지만 일단 길을 나서보니 눈이 아주 많이 내린 것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두려움 가득한 마음으로 눈 쌓인 길에 남겨진 발자국들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걷기 시작했습니다. 뒤돌아 산장을 보니 사람들이 창밖으로 길을 나서고 있는 저희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산장 주위는 푹푹 빠지는 눈길이었습니다. 입에 김이 나올 정도의 추위도 견뎌야 했습니다. 걷다가 옆지기가 발이 푹 빠질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내 지팡이를 의지해서 발을 꺼내는 모습을 보니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눈이 신발 속으로 들어와 차가웠지만 신발 젖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안전하게 이 길을 뚫고 나가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미끄러져서 안전하게 일어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미끄러지는 것을 무서워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거북이걸음을 걷는 저희를 한 팀이 지나쳐 갔습니다. 남성 두 명, 여성 한 명이 함께 걷고 있던 팀이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길을 비켜주는 저희에게 "아리가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본인인 줄 알았나 봅니다. 우리는 한국인이라 했더니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이후에 벌어졌습니다. 앞서 걷던 그들이 계곡 건너편에서 저희에게 뭐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거리였으므로 그냥 조심하라는 의미겠지 하면서 걷는데 폴대로 아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손짓으로 알았다고 먼저 가라고 신호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행 중 한 명이었던 여성이 가던 길을 되돌아오더니 저쪽은 경사가 너무 급하다고 길이 아닌 모양이라고 하면서 안전한 길을 찾아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몇 걸음 걷더니 바위 위에 쌓인 눈을 치워서 두 줄짜리 등산로 표식을 찾아 저희에게 보이면서 이 길을 따라오라고 신호를 해주더군요.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습니다. 산을 잘 타는 클라이머들은 웬만한 길은 그냥 뛰어 내려가면 되지만 저희 같은 아마추어들은 등산로를 따라가는 것이 맞는 것이지요. 그 아가씨도 동료들과 함께 스릴 있는 경로를 갈 수도 있었을 텐데 동양에서 온 나이 든 사람들을 배려하며 길을 가는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멀리 앞서가는 아가씨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아가씨가 폴대로 한쪽을 가리켜 주었습니다. 절벽에서 놀고 있는 아이벡스였습니다. 큰소리로 "아이벡스"했더니 아가씨도 맞다고 하면서 계속 걸었습니다. 잠깐이지만 저희와 그 아가씨는 한 팀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어느덧 눈길을 지나니 앞서가던 세명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우리를 돕기 위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야생화와 푸른 풀밭을 덮은 잔설이 한여름밤에 내린 눈의 증거처럼 남아 있습니다.
드디어 세이뉴 고개(Col de la Seigne, 2,520m)가 적힌 첫 표지판을 만납니다.
오전 8시를 조금 넘기는 시각. 열심히 걷느라 몸에 땀이 배이기는 했어도 여전히 쌀쌀합니다. 지금까지 TMB 걷기 내내 날씨가 참 좋았는데 오늘은 구름이 많습니다. 가끔 한두 방울 비가 내리는 것 같았지만 본격적으로 비가 뿌리지 않는 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요. 힘든 코스에 비가 내리면 그야말로 최악이니까요. 이제 글레이셔 빙하 하단 지역을 통과하는가 봅니다. 본격적으로 여러 장애물들을 통과해야 하는 경로에 도달한 것입니다.
바위를 타고 절벽을 내려가는 폭포의 모습이 아찔하지만 이곳은 그나마 가볍게 지나는 장소이고 앞으로 닥쳐올 장애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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