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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야마(Wakayama, 和歌山)역의 코인락커에 배낭을 맡겨둔 다음에는 와카야마 현립 박물관과 근대 미술관을 향합니다. 와카야마역에서 2킬로미터 내외의 조금 애매한 거리이지만 와카야마 시내를 걷는 목적이 크므로 보슬비 가운데서도 걷기로 했습니다.



사실 와카야마역 앞에서 와카야마성이나 미술관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면 탔을 수도 있었습니다. 비오는데 굳이 힘들게 걷을 필요 있냐 싶기도 하니까요. 만약에 역에서 미술관이나 와카야마 성으로 가기 위해 대중 교통을 이용하고 싶다면 택시를 타면 됩니다. 저희도 역으로 돌아 올 때는 택시를 이용했습니다. 기본 요금 정도면 되니까요.



보슬비 가운데 우산을 들고 걷다보니 와카야마성까지 1.5Km가 남았다는 한글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이곳도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모양입니다. 이런 표지판이 있을 정도이니 걷는게 맞겠지요?



역 앞을 벗어나 걷다보니 한동안은 덮개가 있는 인도라서 우산없이 걸을 수 있었습니다. 호텔과 식당, 각종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였습니다. 길을 걷다가 길 건너편에 도요타 자동차 대리점이 위치한 곳에서 길을 건너서 자동차 대리점을 끼고 있는 골목으로 걸으면 미소노 공원을 지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것으로 가득한 미소노 공원(Misono Park, 美園公園) 입니다. 자전거 타기를 연습할 수 있는 코스와 공중 화장실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공원 화단에는 클로버 잎과 비슷한 모양의 잎을 가진 키 작은 풀들 사이로 노란 꽃들이 수줍게 꽃잎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흐린 날씨라서 꽃잎을 오므리고 있지만 햇빛이라도 비췰 요량이면 꽃잎을 활짝 펼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미소노 공원 근처에 있는 한 집에서는 기와 보수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공사 현장을 보니 일본 가옥들이 기와를 올리는 방식을 살짝 옅볼 수 있었습니다. 튼튼한 판자로 일단 지붕을 올리고 흙과 함께 기와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한옥을 지을때 지붕의 틀이 준비되면 송판이나 피죽을 얹고 흙과 함께 암기와와 숫기와를 얹는 것과 비슷합니다.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현대 건축의 효율성과 전통 가옥의 멋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은 마찬가지일듯 합니다.




와카야마 현립 박물관과 미술관 표지가 있는 138번 도로로 우회전 합니다.



와카야마 시를 북에서 남으로 가르며 흘러 바다로 이어지는 와카(和歌, Waka)강을 건넙니다. 이곳의 지명이 와카야마이고 강의 이름이 와카이지만 "와카"는 우리나라의 시조와 같은 일본의 정형시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시조가 3,4 및 4,4의 운율을 가지다면 와카는 5, 7운율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가는 길에 독특한 모양을 가진 집을 하나 만났습니다. 외관은 마치 샌드위치 판넬을 붙인것처럼 단순했지만 내부에서 밖으로 통하는 창문은 용도별로 다른 모양의 창을 달았고 건물 벽체의 모서리는 대리석 모양의 장식을 달았습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 잡은 것은 환기통에 매달린 새모양의 인형이었습니다. 주인장의 센스와 유머가 곳곳에 묻어 있는 집이었습니다.



멀리 우측으로 와카야마성(和歌山城)이 보입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멀리 우측으로 와카야마성이 보이는 지점에는 좌측으로 오카 공원(Oka Park, 岡公園)이 있습니다. 좌측 그림은 1939년에 미쯔비시에서 제작한 C57119호 증기 기관차입니다. 증기 기관차는 석탄을 태우는 줄았았는데 석탄외에도 목탄이나 원유, 중유, 벙커C유등 태웠다고 합니다. 이 증기 기관차는 중유 탱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측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되어 와카야마시 전철로 사용했던 차량입니다. 두가지 모두 울타리가 있어서 자세히 보거나 탑승해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공원에 있는 미끄럼틀은 보기만 해도 아찔한, 설마 이것을 진짜로 애들이 탈 수 있는거야? 할 정도의 미끄럼틀입니다. 부모들은 위험해 보이고 안전 장치가 거의 없어서 애들을 말리느라 힘들고 겁없는 애들은 타겠다고 난리인 그림이 절로 그려 집니다.



오카 공원 앞에는 이진영, 이매계 현창비(李眞榮, 李梅渓顕彰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1998년에 이만섭 전 국회의장등 이진영의 종친들과 와카야마시가 세운 것입니다. 우측에 새겨진 것은 부모장(父母狀)이라는 문장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인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의 명으로 이매계가 만든 것이라 합니다. 이매계는 유학자 이진영의 장남으로 이진영은 임진왜란 당시 22세의 나이에 포로로 끌려 왔다고 합니다.  이진영, 이매계 이야기를 비롯해서 와카야마는 고대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빈번했던 지역이고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포로로 끌려와서 농노로 고생하다 요리노부의 시강이 되기까지 고향을 그리워 했던 이진영과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본에 효의 가르침을 남긴 이매계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파란 만장한 우리네 삶을 드라마처럼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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