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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리관 1층에서 비너스 조각상을 관람하고 뒷쪽 계단을 통해 반지하층(Entresol)으로 내려오면 거대한 스핑크스를 만날 수 있고 그 앞쪽으로는 중세 루브르 유적과 함께 루브르의 역사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필립 오귀스트(Philippe Auguste, 필립 2세, 1190)와 샤를 5세(1350)때의 루브르 해자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1983년부터 1992년까지 진행된 발굴 작업의 결과물이라 합니다. 루브르 성은 필립 오귀스트가 십자군 원정에 나가기 전에 당시 노르망디부터 파리근교까지 세력을 확장하던 리처드 왕의 영국군으로부터 파리를 방어할 목적으로 세운 성곽입니다. 정사각형 형태로 네 모서리에 탑을 세우고 세느강의 물로 해자를 채워 성을 둘렀다고 합니다. 성의 한 가운데에 가장 높은 탑(donjon)을 세웠는데 현재 그 밑 부분이 발굴되어 관람할 수 있는 것입니다. 



800여년의 기간 동안 중세 요새에서 박물관으로 변천하는 과정에는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주도한 건축 프로젝트들과 이에 함께한 건축가와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루브르 역사 전시실에는 여러 실물 자료와 모형, 그림, 전자 자료등을 관람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서 루브르의 점진적 발전 과정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루브르에 가장 큰 영향을 준것은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필립 오귀스트에 의해 12세기 처음에는 요새로 지어졌지만 14세기에 들어서 샤를 5세가 주거 공간으로 바꾸었고 16세기에 들어서 비로서 프랑스와 1세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을 적용한 궁전이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요새인 동시에 감옥과 창고의 역할을 했지만 궁전으로 변모하면서 미술품의 수집의 본거지가 되기 시작했고 17세기에 루이14세가 베르사유로 옮겨간 다음에는 예술가들의 활동 무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면 장 구종(Jean Goujon)의 작품이 걸려있는데 장 구종이 바로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조각가입니다.




르네상스는 '부활'을 의미하는데 피상적으로는 유럽 문화의 기반인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활한다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건축도 교회 중심에서 벗어나 공공 건물이나 궁전, 주택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었고 작품의 주제도 인간을 강조하고 작품도 재료의 특성을 강조하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루브르가 정식 박물관이 된 것은(1793년)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 였지만, 미술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려는 노력은 혁명 이전인 루이 14세가 베르사유로 궁전을 옮긴 17세기부터가 아닌가 싶습니다. 당시에는 왕실의 소장품들로 시작해서 성직자나 귀족들의 기부 물품과 혁명 당시 귀족으로부터 압수한 물품들, 고고학적 발견에 의한 수집품, 나폴레옹 원정을 통한 전리품등 오랜 기간에 걸친 작품 수집 과정으로 현재는 3만 8천 여점을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높은 기둥 위의 조각들은 자세하게 볼 기회가 없는데 기둥 위의 조각을 자세히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대리석 조각이 이처럼 정교할 수 있는가? 이들의 예술적 감각과 노력은 절로 감탄이 배어 나오게 합니다. 흙으로 빚어도 이렇게 만들기 어려울 텐데 정말 대단합니다. 사실 이러한 조각들은 천장 가까이에 있어서 자세히 보이지도 않을텐데 구석 구석 까지 놓치지 않는 장인 정신이라 해야 겠지요.



궁전에서의 일상 생활을 볼 수 있는 공예품들도 전시하고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과 뛸르히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모형.  루브로의 발전 과정은 파리의 도시 발전 과정과 함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도시의 급격한 팽창은 루브르를 감싸고 있던 성벽을 헐어 버렸고 교회, 개인 주택, 상점과 공원들이 권력 중심부와 가까운 위치로 몰려 들었다 합니다. 나폴레옹 3세 이전까지는 이러한 도시화에 밀려 있다가 1883년 뛸르히 궁전이 파괴되고 뛸르히 정원까지 확 열려서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부터는 장 구종(Jean Goujon)의 작품들로 쉴리관 반 지하층의 장 구종 아틀리에에 전시되어 있는 것들 입니다. 원작을 국립 에꼴드 보자르에서 복원한 것들이라 합니다. 장 구종의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이렇게 별도의 아틀리에가 마련된 것은 그가 1555 ~ 1562 년에 걸쳐 루브로 서쪽 연장부의 조각을 담당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레우커스, Zaleucus". 1560 ~ 1564 년경의 작품.  초기 이탈리아 남부에는 잘레우커스라는 통치자가 있었는데 간음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고 그것을 어기면 두 눈을 뽑는 형벌을 제시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첫 범법자가 그의 아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신하들은 아들의 죄를 용서하라고 청했으나 법의 취지가 흔들릴 수 없으므로 거부하고 법대로 시행하기를 명령했다고 합니다. 결국 잘레우커스는 아들의 한쪽 눈과 자신의 한쪽 눈을 뽑아서 법을 지키면서도 아들에 대한 사랑도 표현한 사람이 되었다 합니다.



"제사장, The priest". 1560 ~ 1564 년경의 작품. 신들을 향한 경건함을 상징하는 조각.



"캄비세스 왕의 재판, The Justice of Cambyses". 1560 ~ 1564 년경의 작품. BC 6세기경의 고대 페르시아 왕인 캄비세스 2세와 연관된 일화가 담긴 작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방식의 형벌을 내리던 당시에 재판의 부정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는 일화라고 합니다. 당시 재판관이었던 시삼네스가 뇌물을 받은 사건에 대하여, 캄비세스 왕은 살아 있는 상태에서 껍데기를 벗기는 처벌을 내리고 그 껍데기를 재판관 의자에 깔도록 했다가 합니다. 게다가 다음 재판관으로 부정을 저리른 시삼네스의 아들인 오타네스를 임명했다고 하니, 이야기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한 이야기입니다.



위의 조각에서 부정을 저지른 시삼네스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위에 앉은 아들의 외면하는 눈길이 안타까워 보입니다.


루브르를 2시간여 둘러보아도 허리에 손을 얹어야만 하니 이곳이 얼마나 큰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둘러본 것을 정리해 보면 30 ~ 40% 정도 둘러 보았을까요? 꼼꼼하게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람한다면 3일도 부족 하겠다 싶습니다. 나머지는 다음(?)을 기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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