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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에서 내려 버스로 성삼재까지 이동한 이후 4시간여의 걷기를 하다 보니 네 가족 중에서 슬슬 체력의 한계를 호소하며 다리 근육을 매만지는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앞선 두 사람과 뒤따라오는 두 사람 간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기다렸다 걷기를 반복하다 보니 점점 산행 시간은 늦어집니다. 이제는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어도 워낙 많이 걸어온 터라 낙오자가 없도록 달래기도 하고 채근하기도 하며 하산 이후 버스 시간에 맞추어 보려고 노력해 봅니다. 산행 코스는 대피소 예약을 못했기 때문에 벽소령 대피소를 지나서 의신마을 쪽으로 하산할 예정입니다.

 

토끼봉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첫 지리산 산행의 추억이 어린 곳으로 눈이 가득히 쌓인 관목숲 사이로 이어진 등산로 풍경이 인상적이었던 장소입니다. 바로 진달래숲 사이의 등산로를 걷을 수 있는 장소입니다.

 

토끼봉 주변의 숲길은 온화하게 이어져서 토끼가 많이 나와서 토끼봉이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와 전혀 무관하고 앞서 지나온 반야봉의 정동 쪽에 있는 봉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를 기반으로 24방위를 나타내는데 자(子)방이 정북이고 묘(卯)방이 정동이라서 토끼봉이라 하는 것입니다.

 

토끼봉 근처부터 시작해서 연하천 대피소 근처까지 드문 드문 계속 만나게 되는 보랗빛 꽃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군락으로 때로는 몇 송이로 지리산 종주 코스를 걷는 이들에게 걷기의 피로를 날려주는 나비의 춤 향연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백합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얼레지꽃(Erythronium japonicum)입니다. 이른 봄의 전령사처럼 꽃을 피운다는 얼레지의 매력에 잠시나마 푹 빠져 봅니다.

 

한 겨울 세찬 눈보라가 지나가면 환상적인 눈꽃 절경을 선사해주던 구상나무 고목을 배경으로 토끼봉의 진달래 군락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구상나무 고목은 지금은 마른 뼈와 같지만 한겨울 눈꽃 세상에서는 제일 멋진 풍경의 주인공입니다.

 

보고 또 보아도 질리지 않는 진달래. 

 

토끼봉의 환상적인 진달래 군락지를 걷는 행운을 누립니다. 눈길을 걸을 때 이곳에 핀 꽃을 상상하며 얼마나 좋을까? 하며 상상하다 꽃이 있는 시기를 매번 놓치곤 했는데 드디어 진달래 꽃이 한창이 이 길을 걷는 감격을 누립니다.

 

질리지 않는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하고 있는 진달래 군락지입니다.

 

이번 산행을 하면서 예전과 크게 달라진 점중에 하나는 바로 수많은 산악회 이름으로 달아 놓던 시그널, 리본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한겨울 눈이 많이 쌓인 경우 산행로를 알려주던 시그널인데 이제는 국립공원에서 꼭 필요한 경우에만 위의 그림처럼 표시하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한 것입니다. 찾아보니 얼마 전부터 산악회 차원에서도 리본을 달지 말도록 계도하고 있고 국립공원에서도 꾸준하게 제거 작업을 하는 모양이었습니다.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으니 시그널의 의미로 매달아 놓는 리본들은 대부분 자기 자랑과 욕심의 산물이고 쓰레기인 것이지요. 잘 되었다 싶었습니다.

 

드디어 점심식사 장소인 연하천 사장에 도착했습니다. 집에서 싸온 김밥에 가스 버너로 물을 끓여서 컵라면으로 넉넉한 점심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맛 좋은 샘물이 풍성하게 나오는 연하천 대피소는 테이블과 의자도 넉넉해서 좋았습니다. 연하천 대피소 근처에서는 음주 금지라는 표지판이 있었는데 적절한 제도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항상 한잔 하신 분들 주변은 시끄럽고 사고의 위험도 있기 마련이니까요. 

 

또 다른 공식적인 시그날 표지입니다. 일반 산악회 리본들이 사라지고 공식적인 시그널이 꼭 필요한 곳에만 최소한으로 있으니 깔끔하니 좋습니다.

 

여러 펜션이 자리한 음정 쪽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는 삼각고지입니다. 일행 중에 몸의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거나 산장에 예약하지 못한 분들은 음정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나마 체력을 아낄 수 있는 방법입니다. 벽소령 대피소까지 갔다가 음정으로 내려가거나 저희처럼 의신 쪽으로 내려가면 좀 더 힘이 들 수 있습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가 자신의 존재감을 꽃으로 뿜어 냅니다.

 

삼각봉과 형제봉을 지나는 길목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이곳을 지나갔다는 기억을 선명하게 남겨줍니다.

 

녹음이 서서히 올라오고 있는 산의 능선들.

 

진달래는 활짝 피었지만 다른 나무들은 겨울눈으로 한겨울을 지낸 꽃눈과 잎눈들이 이제 터지기 일보 직전입니다.

 

벽소령 대피소를 지척에 두고 있는 형제봉 아래의 표지판입니다.

 

바위에 맺힌 수많은 세월의 이야기가 전해 지는듯 합니다. 바위 끝에 자리한 소나무의 기상이 마치 할아버지 곁에서 재롱부리는 아이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지리산 자락에는 형제봉이 3개가 있는데 방금 지나온 주능선의 형제봉과 구례 형제봉, 행글라이더 활공장이 있는 악양면의 형제봉입니다. 지나올 때는 오르락내리락 길이 험했는데 돌아보니 완만한 봉우리네요. 형제봉은 두 형제가 등을 맞대고 도를 닦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고요한 지리산 능선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커다란 바위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오후의 태양을 받으면서 벽소령 대피소를 향합니다.

 

드디어 저희의 목표지와도 같은 벽소령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뒤쳐지는 일행 덕분에 오후 3시를 바라보는 벽소령 대피소에서는 산장 예약이 없는 분들은 하동이나 음정 방면으로 빨리 하산하고, 세석이나 장터목 산장을 예약한 분들은 산의 기상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 부지런히 이동하는 방송을 계속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벽소(碧霄) 또는 벽공은 푸른 하늘이란 의미로 벽소령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달빛이 맑고 희어서 푸른빛으로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벽소령 대피소의 화장실은 거품식 수세식인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연하천 산장만큼 물이 풍부한 것이 아니라서 물을 뜨려면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못 가겠다는 사람들이 어디서 하산할 수 있냐고 묻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리산 종주 구간 중에 가운데에 해당하는 지점으로 저희처럼 하동 쪽 의신 마을로 내려가거나 반대 방향인 함양 마천면의 음정으로 내려갈 수가 있습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하동 의신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돌계단이 쭉 이어 집니다. 이 계단에서 외국인 커플을 만났는데 앞서 내려가던 아들내미가 위로 올라가면 물을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길래 벽소령 대피소에서 길어온 물을 마시게 했다고 하더군요. 의신 마을에서 올라오는 코스도 화엄사 코스에 비견할 정도로 올라가는 게 결코 쉽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쪽으로 올라갈 분이시라면 탈진하지 않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는 물이 풍부하지 않았지만 얼마간 내려오니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릎이 좋지 않다보니 벽소령 대피소에서 700여 미터 내려오기까지도 40여분 가까이가 소요되었습니다. 계단을 콩콩 뛰어 내려가던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피소에서 700여미터 내려간 지점에는 계곡을 건너는 작은 다리가 있었습니다. 계곡을 건너는 다리에서 바라본 계곡물의 모습입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잠시라도 신발을 벗고 찬물에 발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1.3Km 정도 떨어진 거리부터는 예전에 임도였던 길을 걷습니다. 특이했던 것은 이 코스에서는 탈진, 심장마비 등 안전사고 주의 표지판을 자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신흥이나 의신 마을에서 시작해서 벽소령까지 간다면 결코 쉽지 않은 산행길이란 점을 알려주는 모습입니다. 포장도로가 있는 곳이 삼정 마을이므로 최소 삼정 마을까지는 걸어야 하고 버스를 타려면 의신마을에서는 하동 가는 버스가 오후 5시가 막차이고 의신 마을에서 4.2Km 떨어진 신흥 마을에서는 구례 가는 버스가 18:40이 막차입니다.

 

옛 임도길은 완만한 내리막으로 꽃향기를 맡으면서 걷기에 참 좋은 길이었습니다. 한 가지 흠이라면 작은 날벌레가 왜 이렇게 달려드는지 몸도 힘든데 벌레 쫓느라 짜증까지 더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가는 길에 청년 커플을 만났는데 그들은 망이 달린 모자를 쓰고 걸었는데 처음에는 연예인인가? 왜 얼굴을 가리고 걷지? 했는데 날벌레들에게 한참을 괴로움 당하고 보니 그들이 철저한 준비를 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벌레들만 아니라면 완만한 임도는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었습니다.

 

임도를 걷는 내내 꽃향기에 젖어서 걸었는데 그 주인공인 초롱 모양의 꽃을 가진 나무입니다.

 

정체를 찾아보니 꽃이 기다란 호리병처럼 생겼다 해서 병꽃나무라 합니다. 꽃은 옅은 노란색에서 점차 붉은빛을 띤다고 합니다. 추위와 공해에도 강한 관목이라 합니다. 꽃도 예쁘지만 향기도 참 좋았습니다.

 

얼마간 편하게 걸었던 예전 임도가 끝나면 삼정 마을을 1Km 남겨둔 시점에서 다시 경사도 있는 산길을 내려갑니다. 포털 지도에 보면 이 임도는 지금은 일부 구간의 흔적만 남아 있지만 예전에는 벽소령까지 이어진 길이었나 봅니다. 

 

흙의 유실을 막기 위해 곳곳에 코코 매트라고도 불리는 야자 매트를 깔아 놓았습니다. 지리산 등산로 보호를 위해서 물 건너온 야자 매트를 깔아 놓은 현실이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현실적인 방법이었겠죠?

 

오후 5시 30분이 넘어가는 시각, 드디어 삼정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포털 지도에는 정식 도로가 표시되지 않은 곳입니다. 실제로 이곳에 도착해서 보니 의신마을 근처까지는 콘크리트 포장이었습니다. 의신 마을에서 하동으로 가는 버스는 이미 막차가 떠난 시각이고 삼정 마을에서 거의 8Km를 걸어야 하는 신흥 마을까지는 체력과 시간 모두 무리였습니다. 결국 삼정마을에서 콜택시가 가능한지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지난번 가탄마을에 자동차를 세워두고 둘레길 16코스를 걷기 위해 송정 마을로 이동하기 위해 이용했던 콜택시 번호 055-883-2332로 전화를 걸어 여쭈어 보니 삼정마을도 알고 계셨고 택시도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다들 지쳐 있던 터라 얼마나 고맙던지 삼정마을에서 구례구역까지는 5만원, 삼정마을에서 화개장터 옆의 화개 터미널까지는 3만원이라 하셨습니다. 전화한 지 30여분이 지나니 택시가 도착했습니다. 택시를 타고 계곡을 따라 내려가니 화개장터까지 내려가는 것도 한참이었습니다. 삼정 마을에서 의신 버스 정류장과 신흥 버스 정류장을 차례로 지나는데 이 길을 어떻게 내려왔을까 싶은 게 악! 소리가 나는 길이었습니다. 택시를 타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의외로 삼정마을에서 택시를 부르시는 분들이 많다고 하더구요. 입이 아플정도로 기사분과 이야기 꽃을 피우다보니 나중에는 이제는 그만 조용히 가고싶다라는 마음으로 속으로 "제발!"하는 외침이 있었습니다.

 

이번 산행은 힘들었지만 멋진 경관을 선물로 받고 가족들과 함께한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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