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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입대를 앞두고 있던 10대의 마지막은 한겨울 감행한 지리산 종주였습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산행이라 배낭도 선배에게 빌린 것을 메었고 동대문에서 구입한 새 등산화에 왁스를 넉넉히 바르고 스패츠와 아이젠을 착용하며 걸었던 겨울 등반은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길 정도로 힘들었지만 수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화엄사, 노고단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과 법계사에 이르는 지리산의 아름다움은 그 이후로도 꾸준하게 지리산을 찾게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리산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지리산 코스 곳곳을 누비고 이제는 둘레길도 걸으니 돌아보면 지리산은 사람을 키워내는 산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물론 산을 오르다 몸의 한계가 올 무렵이면, "내가 미쳤지 지금 이곳에서 내가 무슨 짓인가?"하는 한탄을 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다시 이곳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참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습니다. 서울에서 천안까지는 막차이지만 조치원역에서는 00:14에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지리산 등반을 시작합니다. 7월이면 다녀올 TMB(뚜르 드 몽블랑)를 대비해서 완전한 지리산 종주를 할 마음이었지만 하루 만에 마감되는 산장 예약을 실패해서 무박으로 종주 코스 일부를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무박이니 만큼 선반에 올려놓은 배낭은 도시락과 점심을 해결할 휴대 가스버너와 코펠이 전부입니다.

 

서대전을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는 무궁화호 기차는 일찌감치 매진된 기차라 그런지 막차임에도 좌석은 꽉꽉차고 선반도 배낭들이 가득합니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각 기차는 구례구역에 도착했습니다. 새벽 시간 구례구역은 배낭을 메고 분주하게 역을 나가는 등산인들로 넘쳐 납니다.

 

구례구역 앞은 성삼재까지 1인당 1만원하는 택시들의 호객 소리로 시끌벅적합니다. 저희는 역 앞에 대기하고 있는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합니다. 택시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버스는 서서 갈 장소가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버스는 일단 구례 버스 터미널까지 이동했다가 노고단 아래 성삼재까지 가는 사람들이 표를 끊을 수 있도록 얼마간 터미널에 정차합니다. 많은 분들이 배낭으로 자리를 맡아 놓고 내렸다가 터미널에 있는 무인 티켓 판매기로 표를 끊은 다음에 다시 승차합니다.

 

3시 40분에 구례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10분 정도 달려 화엄사 입구에 도착합니다. 뒷쪽에 배낭을 가지고 타신 몇 분은 화엄사에서 내리는데 거의 묘기에 가깝게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가야 했습니다. 버스가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 주위는 아직 어둡고 다들 밤차에서 잠을 설쳐 피곤하지만 산행에 대한 설렘으로 배낭을 정비하고 씩씩하게 길을 나섭니다. 처음에는 플래시를 켜고 움직였지만 오히려 플래시를 끄고 잔잔하게 퍼지는 여명에 의지하여 천천히 걷는 것이 좋았습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으로 가는 길은 잘 정비되어 있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몸을 워밍업 하는데 딱입니다. 어느 가정들은 어린이 날을 맞이 해서 아이들과 함께 노고단을 방문한 모양인데 아이들과 함께 걸어도 좋은 길입니다. 화엄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무넹기 근처까지는 산길 대신 계속 포장로를 걸어도 좋습니다.

 

한 시간여를 걸어 노고단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걷다 보니 날도 밝았습니다. 택시를 타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대피소에서 아침을 준비하느라 분주한 모습입니다.

 

연분홍빛 진달래가 헉헉 거리며 걸어온 상춘객을 맞아 줍니다. 맑은 분홍빛의 진달래가 정말 이쁩니다. 한 시간여의 걷기이지만 등에는 땀이 배이고 얼굴은 붉게 상기되는 몸을 변화로 지리산 등반의 맛을 보기 시작합니다.

 

노고단 대피소를 떠나 10여분 걸으면 도착하는 노고단 고개에 이르니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노고단 고개에 도착한 시간은 5시 40분 정도인데 생각지도 못한 노고단의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5월 초의 노고단 일출은 5시 30분 정도이니 방금 전에 해가 뜬 것입니다. 붉게 물든 일출을 감상하며 인증샷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의 웃음 가득한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노고단 하면 지금까지는 장엄하게 펼쳐진 운해만 생각했는데, 맑은 날 만나는 일출도 일품입니다.

 

산 능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보니, 한겨울 천왕봉의 일출을 렌즈에 담으려 눈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진사들에 대한 기억이 새롭습니다.

 

노고단을 물들이고 있는 진달래.

 

어릴 적 지리산을 다닐 때는 전혀 만날 수 없었던 표지판. "반달곰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는?"이라는 안내판입니다. 평소 반달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라는 혹여 등산 중에 곰을 마주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몇 가지 주의 사항만 주지하고 있으면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탐방로를 유지하고 뒤를 보이고 도망하지 말며, 금속성을 내는 호루라기 하나는 준비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노고단 돌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본 노고단 고개의 모습과 하루 탐방객을 제한하는 노고단의 모습입니다.

 

강렬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피아골 삼거리를 향하여 길을 이어 갑니다.

 

진달래는 활짝 피었지만 나무들은 조심조심 잎을 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진달래. 분홍빛에 붉은 태양빛이 더해진 빛깔입니다.

 

맑은 하늘이 선사해 주는 해무리의 모습도 장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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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하는 노래를 절로 부르게 만드는 환상적인 진달래 축제가 벌어집니다.

 

산행 초반 가벼운 발걸음만큼 주위를 돌아보면 볼수록 곳곳에 봄의 생명력이 아름답습니다.

 

지리산 종주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능선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있죠.

 

커다란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뿌리를 내린 진달래도 꽃을 피운 지금 한 폭의 산수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돼지령(1,370m). 부근에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는 돼지평전이 있어 붙여진 이름인데 돼지 평전에는 멧돼지들이 좋아한다는 둥굴레가 많이 서식한다고 합니다. 돼지령을 "비목령"이라고도 부르는데 바로 무명용사를 기리는 가곡 비목(碑木)의 주인공은 아니고 1970년 산행을 하다 동사한 고교생 3명을 기리는 비목이 세워져 있던 곳이라 합니다. 노고단에서는 멀지 않지만 천왕봉 쪽에서 노고단으로 향하는 산행을 하는 경우 이곳이 탈진 조난 사고가 빈번한 고비라 합니다.

 

피아골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만나는 피아골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이쪽 코스로도 등반을 했었는데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네요.

 

피이골 삼거리에서 십여분 걸으면 만나는 임걸령입니다. 오래간만에 지리산 산행을 하다 보니 500미터마다 세워진 표지판을 비롯해서 안전 쉼터까지 다양하면서도 깔끔한 시설들이 자리하고 있네요. 임걸령은 반야봉을 비롯한 주위의 봉우리들이 바람을 막아주는 천혜의 요충지로 예전부터 도적들의 은거지였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임걸이라는 의적의 본거지였다고 해서 임걸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사철 샘이 나오는 곳입니다.

 

반야봉으로 가는 길과 삼도봉을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종주 코스로 갈라지는 노루목입니다. 노루목이라는 이름은 노루가 다니던 길목이라는 의미와 이곳 지형이 노루의 목을 닮았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저희는 삼도봉을 향해서 갑니다.

 

아기 엉덩이처럼 보인다는 지리산의 제2봉인 반야봉의 모습입니다. 사실 지리산에는 천왕봉 다음에 제석봉, 중봉 등 반야봉보다 높은 봉우리가 있음에도 불교적 배경 때문인지 반야봉을 지리산 3봉 중의 하나로 꼽습니다. 서쪽의 노고단, 중앙의 반야봉, 동쪽의 주봉인 천왕봉 이렇게 지리산 3봉이라고 합니다.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면이 만나는 곳인 삼도봉에 도착했습니다. 삼도를 상징하는 삼각 철제 구조물이 이곳이 삼도의 경계선임을 나타내 줍니다.

 

삼도봉은 예전에는 바위가 낫의 날처럼 생겼다 해서 낫날봉으로 불렸는데 이후에 음이 변형되며 날라리봉, 늴리리봉 등으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지리산의 능선을 보고 있으면 고요한 녹음의 바다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능선 따라 5월의 지리산은 진달래 천지입니다. 진달래 따다가 예쁜 화전 하나 부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진달래 꽃으로 빚은 당진 면천의 두견주도 생각나고요.

 

바위 절벽에 매달린 진달래가 지리산 능선을 배경으로 한 폭의 그림을 제공합니다.

 

발걸음을 멈추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입니다.

 

바위 끝에서 남다른 기상으로 쭉쭉 뻗은 소나무도 일품입니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가는 길에서는 무릎이 약한 사람에게는 최악인 5백 개가 넘는 계단을 만납니다. 물론 거꾸로 걸어 올라오는 사람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저질 체력에 허약한 무릎으로는 거북이 산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화개재에 만난 안전 쉼터. 배낭 걸이와 벤치까지 쉬어가기에는 너무 좋은 공간입니다. 화개재는 뱀사골 코스와 이어지는 장소로 예전에는 뱀사골 쪽의 남원 산내 장터의 상인들과 하동 쪽의 화개장터 상인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고개라 합니다. 노고단 고개에서 3시간 정도 걸렸는데 저질 체력의 거북이 산행치고는 준수하게 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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