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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기간? 따져보면 얼마 되지 않는 장기간 걷기 여행의 공백을 떨쳐 내면서 5박 6일에 걸친 장기간 걷기 여행을 떠난다. 이른 새벽, 거의 첫차에 가까운 부산행 KTX에 몸을 실었다. 시간을 절약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이 시간대의 기차는 예매 시 할인이 있다. 가벼운 배낭으로 허약한 체력을 보완하면 좋으련만, 두 사람의 배낭은 짐으로 꽉 차서 두툼하다 못해 뚱뚱하다. 배낭을 메고, 벗을 때마다 으싸! 아이고! 하는 감탄사, 아니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해외 트레킹이라면 출국, 입국 수속 때마다 꺼내야 하는 불편함도 그렇고 망가질까 하는 걱정 때문에 노트북은 지참 목록에서 제외했는데, 국내 여행이라는 안이함 때문일까, 하루 일정을 끝내면 숙소에서 조금의 일이라도 해보겠다는 호기로 큼지막한 노트북도 챙겼다. 국내는 모텔도 인터넷은 빵빵하니까! 아직 쌀쌀하지 않은 날씨 덕택에 옷가지는 얇은 두세 벌의 여분만 챙기고 매일 빨래를 할 계획이다. 이 방법은 매일 땀에 절어 버리는 옷에도 불구하고 짐을 줄이면서 다음 날 냄새나지 않는 옷을 입는 방법이다. 문제는 식량이었다. 매 끼니를 식당에서 해결하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지만,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식당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걷고 있는 지역 음식 중에 매력적인 것이 있다면 현지 식사로 해결하지만 되도록 삼시 세끼를 버너로 직접 밥을 해서 해결하기로 했으니 쌀과 버너, 밑반찬이 한 짐이다. 그렇게, 호기로운 부부의 해파랑길 걷기가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여명을 뚫고 달리는 KTX 안에서 평화로운 여행의 시작을 누린다.
이른 아침 도착한 부산역의 풍경은 주말을 보내고 새로운 한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분주함과 평일 이른 아침의 평화로움이 교차한다. 출근하며 늦지 않으려고 조바심 내던 때가 추억되기도 하지만, 가을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주는 싱그러움은 일상을 접어두고 여행에 나선 여행자의 정체가 체감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부산역을 나와 우측으로 가면 맛집들이 많은데 이른 아침에 영업하는 곳은 한두 곳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 출장 때면 먹던 음식을 먹자고 옆지기에 제안하니 좋다고 한다. 이번 여행 첫 끼니는 돼지국밥. 돼지띠 옆지기는 돼지 국밥도 좋아한다.
내가 돼지 국밥을 처음 만난 것은 출장길이었다. 10여 년 근무했던 첫 직장을 나와서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던 시기, 직장 동료에 이끌려 처음 만난 돼지 국밥이었다. 뽀얀 국물과 매콤한 양념에 무친 부추를 듬뿍 넣어 먹었던 돼지 국밥은 고기는 투박했지만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지금까지 먹었던 설렁탕도 아니고 곰국도 순댓국도 아닌 것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돼지 국밥의 유래를 찾아보니 어찌 되었든 우리나라 굴곡진 역사의 전환점인 한국 전쟁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기는 하는데 시간 따라 사람들의 입맛 따라 흘러온 음식의 정확한 유래를 어떻게 찾을 수 있으랴!
아침을 든든하게 먹은 우리는 해파랑길 1코스의 시작점인 오륙도로 걸음을 옮긴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만 해도 사람이 두 명이고 체력 안배를 위해서 택시를 타고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든든한 아침을 먹고 나니 사람도 많지 않을 것 같아서 버스를 타고 오륙도로 이동하기로 했다. 부산역 앞 택시 정류장은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들로 아침부터 분주하다. 택시 정류장을 가로질러 부산역 광장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한다.
시작점인 오륙도로 가려면 "용호동"으로 가는 27번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가로지르면 곳곳에서 다양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시내버스를 타면 택시와는 다른 풍경을 만난다.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전통시장의 모습도 보고, 대도시 부산답게 꽉꽉 막히는 차들 사이에서 버스 전용 차선으로 내달리는 버스의 혜택도 누린다.
언덕을 올라 목적지 근방에 이르면, 정류장 이름에 "오륙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오륙도 초중학교, 오륙도 SK뷰 정문, 오륙도 스카이워크. 우리가 내릴 목적지는 "오륙도 스카이워크" 정류장이다. 타이즈를 갖춰 입은 처자들, 등산복으로 나는 여행객이요!라고 티 내는 사람들, 우리처럼 제 몸에 버거운 배낭을 "어이구"하며 둘러메는 사람들이 우르르 버스를 내린다.
버스를 내려 조금 걸으니 멀리 "오륙도 해파랑길 관광안내소"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야 해파랑길을 시작하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정해진 코스를 밟아 여정에 나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시간 여유를 두고 발을 밟는 곳곳에 있는 풍경을 눈에 담고, 이야기를 듣는 것도 참 의미 있는 일이다. 가야 할 길의 조금 반대편 이기는 하지만 오륙도 스카이워크를 다녀오기로 했다. 입장료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니 튼튼한 두발만 있다면 다녀올만한 곳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해운대 미포항은 보이지 않지만, 미포항 근처에 있는 엘시티 건물을 통해서 오늘 가야 할 목적지를 어렴풋이 가늠해 본다. 이때까지만 해도 겨우 겨우 힘겹게 숙소에 들어갈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오륙도 스카이 워크로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본 모습. 저 언덕으로 해파랑길은 시작된다.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신발 위에 덧신을 신고 아장아장 유리판을 걸어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곳에서 인증숏도 찍고 한참을 풍경에 빠져 본다. 부부가 덧신을 신고 벗을 때 안내하던 아저씨는 우리가 충청도에서 왔다고 하니 멀리서 왔다고 놀라워하신다. 해운대 달맞이고개와 같은 동쪽에서 보면 6개의 봉우리로 보이고, 영도와 같은 서쪽에서 보면 5개 봉우리로 보인다고 하여 오륙도로 불린다는 유래가 있는데, 화창한 가을 날씨에 멀리 뻥 뚫린 수평선을 배경으로 우뚝 서있는 섬들의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작은 섬들이기는 하지만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 등 나름의 이름이 있다. 진짜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신선대 부두와 영도 쪽을 바라본 모습이다.
멍 때리기 정말 좋은 풍경. 반짝이는 아침 햇살도 좋고, 살랑이는 바람도 좋다.
많은 한국인에게 오륙도 하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일 것이다. "돌아와요 충무항에"라는 노래를 일부 표절한 것으로 판정이 되었지만 개인적으로 노래 가사 중에 나오는 오륙도는 너무나도 궁금증을 유발하는 장소였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로 꺾어지는 멜로디는 노래의 애절함을 더해주는 부분이지만, 나름 역사적인 배경도 있을 법 싶었다. 연락선은 요즘에 쓰는 말로는 페리, 카페리라 할 수 있는데 노래에서 말하는 연락선은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이어주는 부관 연락선을 의미한다고 한다. 오륙도의 등대는 부산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으므로 노래의 배경은 충분히 이해할 법 싶다. 일제 강점기 한일 간 대동맥 역할을 하면서 수백만 명을 실어 날랐던 부관 연락선을 타던 사람들의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그 어떤 지면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을까? 징용으로 끌려가던 사람들, 유학에 나선 사람들, 조선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려던 일본인들...... 이 연락선은 주인과 이름은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부산과 시모노세키 간에 부관훼리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운행 중이다.
아파트 정원과도 같은 언덕 위의 정원을 향하여 드디어 해파랑길을 시작한다. 최소 6억은 있어야 살 수 있는 저 아파트에 사는 저 사람들은 매일 저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살면 정말로 행복할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길을 시작한다.
배낭도 물도 없는 앞선 커플이 서로를 밀어주며 언덕길을 오른다. 해파랑길의 시작이 언덕이라는 점은 돌아보니 큰 의미가 있었다. 매 코스마다 높지는 않지만 산길을 걷는 일정으로 시작하다가 바닷길을 걷는 여정이 이어졌다. 따져 보면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제주 올레길을 걷는 느낌이랄까?
길의 시작을 꽃댕강나무가 환하게 밝혀준다. 6월에서 10월까지 피운다는 꽃의 끝물을 만난 격이다. 하얀 꽃, 연한 분홍꽃으로 앞으로 다가올 저질 체력의 한계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게 마취시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댕강 나무라는 나무의 이름이 독특한데 그 유래는 꽃과 새 가지의 밑 부분이 댕강 댕강 잘 부러져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가지를 꺾을 때 댕강 댕강 소리가 나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꽃말이 "평온함" 이라는데 평화로운 걷기가 되라는 축복 같기도 하다.
또다시 이목을 집중시키는 구절초. 가을이면 아홉 개의 마디가 생긴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부인병에 좋은 약초란다. 고급 아파트 단지 앞에 있는 공원답게 다양한 식물들을 잘 가꾸고 있었다. 드문 드문 길 고양이를 배려하는 먹이 그릇들도 있었다.
사람들이 산책을 많이 하는 아파트 단지의 공원을 벗어나 본격적인 산길에 이르자 환삼덩굴이 길을 정복하고 있다. 생태계 교란종으로 환삼덩굴이 발생하면 다른 식물들을 고사시켜 버리는, 가시가 있는 고약한 식물이다. 가시가 워낙 강해서 맨살에 잘못 긁히면 상처가 날 수도 있다. 그런데, 황무지에서도 잘 자라는 이 고약한 식물도 알고 보면 율초라고 하여 약초로 활용한단다. 해열과 이뇨 작용도 있고 해독 작용도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거칠어도 초식동물들은 잘 먹는 식물이다. 세상 내가 알던 많은 상식이나 신념이 쉽사리 깨질 수도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나무 계단을 한참 오르다 뒤돌아본 모습. 가까이 지나쳐온 공원과 멀리 오륙도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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