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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을 따라 하동군 고전면까지 남동 방향으로 내려왔던 백의종군길은 하동읍성 이후로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양보면을 가로지르고 살티재를 넘으면서 북천면 사평리로 들어왔다. 계봉 자락의 산지를 내려가면서 사평마을회관 앞을 지나는 길은 2번 국도 충무공로를 가로질러 모성마을로 향한다. 모성마을을 지나온 길은 마을 뒤편의 산지를 임도를 따라 걸으면서 북천면 사평리에서 서황리로 넘어가고 중촌마을의 마을길을 가로질러 곤양천 화정 1교 다리 앞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사평리의 배안골을 지나는 길, 한 농가에서 스티로폼에 심은 수박이 앙증맞게 열매를 맺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수박의 90% 이상은 박이나 호박에 수박을 접붙이기해서 키운 것이다. 어릴 적 수박을 먹고 난 씨앗을 심으면 딱 저 정도까지만 크는 것이 이상했던 시절이 있었다. 추위에 강하고 연작을 하더라도 해가 입지 않도록 박이나 호박에 수박을 접붙이면 수분이나 양분 흡수력도 좋다고 한다. 밤나무가 풍성하게 열매 맺고 있는 배안골 마을을 빠져나간다.

배안골 마을을 빠져나오니 예상치 못한 광경을 만난다. 하동 북천 레일바이크로 경전선을 직선화하면서 생긴 폐철로를 레일바이크로 활용하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오르막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북천역에서 관광열차를 타고 양보역으로 가서 레일바이크를 타고 터널과 내리막 구간을 지나 북천역으로 돌아오는 방식이라고 한다. 하루 6회 운영하고 길이는 5.3km에 달한다.


지금은 레일바이크가 다니는 이명터널과 북천역 방면의 철길을 보면서 철길에 대한 옛 추억을 잠시 꺼내고 길을 이어간다.


길은 들판 너머로 동서로 달리는 2번 국도 충무공로를 보면서 사평마을회관 방면으로 이동한다.


사평마을회관 앞에 백의종군로 표지석이 있었는데 이곳 앞으로 2.2Km, 뒤로 2.2Km 모두 산길이라는 안내뿐이다. 위로도 도움도 되지 않는 야속한 표지석이다.


사평마을회관을 지나온 길은 북천천을 건너는 신흥 1교를 지나서 모성마을로 향한다.


모성마을로 향하는 길 좌측으로는 거대한 유실온실이 있었는데 수경 재배로 파프리카를 키우는 농장이라고 한다. 엄청난 투자비를 생각하면......


아직 어떤 산길이 펼쳐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모성마을로 들어가는 길에서는 풍경은 아름답지만 마음 한편에 또다시 풀숲을 헤쳐가야 하는가? 하는 혼란함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모성마을 입구에는 경사진 언덕길에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마을의 수문장처럼 버티고 서있다. 유서 깊은 마을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모성마을에 세운 백의종군로 표지석에도 그저 산길이라는 안내뿐이다. 임도가 있으면 황송하고 사람들이 오가는 등산로라도 감지 덕지한 입장이라 표지석의 내용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마을 골목길의 색 바랜 백의종군길 리본이 위안이 된다.


마을길을 걷다가 1975년에 보수했다는 왕샘을 지나면 마을을 벗어나 천천히 고도를 올리는 산길에 접어든다.


붉은 꾸지뽕나무 열매가 헐떡이는 숨과 함께 오르던 걸음을 잠깐 멈추고 쉬어가게 해 준다. 꾸지뽕나무 잎이 감나무 잎과 비슷하게 생겼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산아래로 북천천이 만들어 놓은 사평리의 들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실 모성마을로 들어오면서 마을 바로 앞으로 논도 적지 않았지만 그 아래로는 2016년에 완공된 경전선 복선 철로가 달리는 곳이기도 하다. 약 2.3Km에 달하는 황치산터널이 지나는 구간으로 논이 있지만 이곳은 가장 낮은 곳이 고도 1백 미터에 이르는 곳이다.


모성마을 뒷산은 온통 밤나무로 땅에 떨어진 밤도 한둘이 아니지만 내 것이 아니니 알밤에 시선을 둘 수 없다. 포장한 임도 구간은 끝이고 이제는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자 긴장감이 더해진다. 옆지기와 함께 지도앱을 이중으로 확인하면 길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런 구간은 나무의 백의종군길 리본을 넉넉히 달아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크다.

숲길에서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보라금풍뎅이를 만났다. 금속광택을 내는 것이 아주 멋있다. 쇠똥구리의 일종으로 배설물이나 섞은 유기물을 분해하여 자연 순환에 도움을 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산길에 떨어진 토실토실하고 반짝이는 알밤을 보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주인이 있는 물건이니 주워 가지는 못하겠고 사진으로 2026년의 가을을 남겨 본다.


숲길을 찾다가 생전 처음 보는 다래 덩굴을 만났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하는 청산별곡에 나오는 그 다래이다. 하동읍성 앞 농가에서는 진짜 머루를 만났는데 이곳에서 다래를 만나다니 이런 행운이!

사실 다래 덩굴만 보고 다래를 안 것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덩굴을 알 수 있었다. 표면이 키위와 달리 매끈했다. 키위와 다래는 모두 다래나무과 다래나무속에 속한다고 한다. 키위가 개량종인 차이일 뿐이라고 한다.


숲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길의 흔적이 남아 있어 지도앱의 도움을 받아 잘 갈 수 있었다.


문제는 산길을 내려가는 지점부터였다. 한쪽으로는 멧돼지가 목욕하는 장소인듯한 웅덩이가 있고 길의 흔적도 점점 더 찾기가 어려워진다.


지도앱이 가리키는 방향을 둘러보지만 사람 키만큼 자란 풀숲뿐이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주위로 배롱나무 군락이 있는 것이 아마도 묘목을 가꾸는 지역이 아닌가 싶었다. 그들이 정리한 길이 있을 것이란 기대로 길을 헤쳐간다. 풀에 긁힌 종아리는 이번 여행의 전리품이 될 듯싶다.


예측대로 인근에 길의 흔적이 있었고 방향은 다르지만 일부는 풀을 베어 놓기도 했다. 다시 숲길로 들어간다.


편백과 같은 키 큰 나무들이 있는 숲길은 역시 보존 상태가 좋다. 상쾌한 숲길을 따라 내리막길을 가벼운 걸음을 걷는다. 여전히 덥지만 은은하게 햇살이 들어오는 숲길은 정말 좋다.


길은 서황리의 민가 인근까지 내려왔다.


색 바랜 백의종군길 리본을 보니 풀숲에서 숲 속에서 길을 찾을 때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반가움이 함께 겹쳐 온다.


눈앞에 보이는 마을을 앞둔 길에도 풀숲이 길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제 고비도 끝났다는 마음에 발걸음은 가볍다.


산을 내려온 길은 중촌 마을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향한다. 아늑한 분위기의 마을이다.

마을에는 경현당이라고 하는 서원이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보필한 최탁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고 한다. 중천마을을 옛날에는 인천(仁川)이라 불렀던 적이 있어서 경현당을 인천서원으로도 부른다.


길은 중촌마을에 하나 있는 교회 옆을 지나서 서황리 북쪽 끝자락으로 간다.


종이 매달린 시골 교회 옆을 지나는 길에서는 색 바랜 빨간 백의종군길 리본도 만난다.


마을 뒤 작은 언덕을 지나 화정 1교 앞에서 산길이 많아서 난도가 높은 백의종군길 20코스의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 코스는 풀숲을 헤쳐나가야 하는 곳이 여러 군데 있으므로 반드시 긴바지와 등산화를 착용해야 하는 구간이다. 다리로 곤양천을 건너가면 북천면 서황리에서 화정리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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