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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언어에서 말을 배운다."  "시작에 대한 로또를 꿈꾸지 말자. 그저 시를 쓰기 위한 펜을 드는 것만으로도 축복이다." 황선식 시집  <검은산 붉은꽃>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요즘 헌책방은 예전과 달라져서 "아름다운 가게", "알라딘" 처럼 체계적인 관리가 더해져서 폭풍 책 쇼핑의 유혹을 던집니다. 대학로에 갔다가 들른 책방에서 아니나 다를까 평소 서점에 가지 못한 한을 풀듯이 이책 저책을 카트에 담았고 계산대에 쌓인 책을 보면서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때 점원이 던진 한마디 "5만원 이상이면 포인트가 더있는데 그냥  계산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급하게 골랐던 책이 황선식 시인의 "검은산 붉은꽃" 시집이었습니다. 비싸지 않은 책이라도 짧은 시간에 책을 고른다는 것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기 만큼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표지에 저자가 누군가에게 직접 별을 그려가며 작성하신 친필 사인을 보면서 과감하게 고른 책이었습니다.

읽으면 읽을 수록 깊이가 있고,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시들이었습니다. 시작을 할때면 억지처럼 만들어 내는 시어가 스스로도 맘에 들지 않았는데 시인은 이를 "화장"한다고 표현하더군요. 삶의 후반기에 삶을 돌아보면서 쓰신 한편 한편이 너무 많은 은유 속에 복잡해진 어려운 시도 아니고 너무 가볍게 표현해 버린 교훈적 수필도 아니어서 간만에 좋은 시집을 만났다는 감사함이 있었습니다.

연륜의 시인에게서 말도 배우고 시를 대하는 자세도 배울 수 있었고 시작에 대한 겸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간만에 잡은 시집을 통해서 내면에 다시금 시작에 대한 열정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했습니다. 

요즈음은 글 쓰는 게 빈칸 메우는 일이 되고보니 이게 나의 버팀목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술 담배도. 맑은 정신으로 낙서(樂書)하는 그날까지 빈칸 자알 메워나가야겠다.

서문을 통해 볼수 있는 그의 진솔함과 시를 대하는 그의 마음은 시집 전편에 걸쳐 꼼꼼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스포일러 일 수 있지만 책제목과 같은 시 한편을 옮겨봅니다.

검은 산 붉은 꽃 2

옥상 화분에 연산홍이 

S라인 몸매로

가지 가득 꽃을 피웠다

꽃잎의 진앙지에서 뻗치는

지진계의 파장으로

꽃멀미에 사로잡힌다

한순간 청맹과니처럼

붉은 장막에 잠기는 눈빛

혀 굳은 벙어리

고막 닫힌 귀머거리가 된다

숨결이 턱, 막힌다

온몸의 세포막으로

꽃물이 부풀어 오르는

오르가슴의 몽롱함


환영에서 깨어났을 때

눈썹 위에 걸려있던

생의 끝자락 지평선이

아득히 물러나있다

꽃의 형통이 싱그러운

기운으로 몸을 휘감는다

검은 산의 붉은 꽃으로

핏속에 활화산을 지핀

회춘이다


무좀과 다알리아를 빗댄 "내 발가락의 달리아", 저무는 인생을 노래하며 시작의 기쁨을 말한 "낙서와의 순애보" 등 시 한편 한편이 시인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았습니다. 좋은 시를 쓰겠다는 욕심은 시인의 입을 닫고 손을 굳게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욕심없이 진솔하게 써내려간 시인처럼 시 한 편의 낙서(樂書)라는 기쁨을 되찾을수 있도록 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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